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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1. 샛강<4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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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문관은 다시 아이 몸에 감긴 전깃줄을 잡아떼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피와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국원이와 나는 정말로 고문관 아저씨가 불쌍해서 더 이상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가 아이의 등에 감긴 전깃줄을 떼어내고 다시 다리에 감긴 부분까지 떼어냈는데, 이번에는 아이를 떼어내자마자 뒤로 넘어졌다. 전선이 그의 온몸을 휘감아버린 것이다. 그는 고무 튜브를 손에 쥐고 허우적거렸다. 아이가 지붕 아래로 끌어내려지자 구경꾼들은 박수를 쳤다. 그러나 그는 식인수에 휘감긴 타잔처럼 지붕 가운데서 전깃줄에 붙잡힌 채 몸을 꿈틀대고 있었다. 고문관이 몸을 굴렸다. 그리고 지붕 끝까지 가서 하반신이 아래로 축 처졌다. 사람들이 일시에 와아, 하고 놀라는 소리를 질렀다. 잠깐 그런 자세로 매달려 있었는데 한길 쪽에서 고물 스리쿼터 한 대가 털털거리며 달려왔다. 순경이 활기를 되찾고 사람들에게 비키라고 고함을 쳤다. 그것은 두 사람의 전공을 태운 전기회사 차였다. 그들은 전선이 늘어진 전봇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지붕 끝쪽에 걸려 있던 고문관이 다리를 버둥거리더니 전선을 몸에 매단 채로 아래로 툭 떨어졌다. 고문관을 휘감았던 전선이 이발소 앞에까지 길에 늘어져 있고 놓여난 그가 길 위에 넘어져 있었다. 국원이가 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죽었을 거다!

사람들이 몰려와서 고문관을 떠메어 가려고 겨드랑이를 잡았을 때, 그가 다리와 팔을 휘저어 뿌리치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피 묻은 양쪽 팔뚝을 쳐들어 모여든 사람들에게 흔들어 보였다.

나는 오랫동안 그 사건에 대한 감동을 지니고 있었다. 나중에야 이런 무지렁이 같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어려운 일들을 치러내며 살아간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어쨌든 그 어려운 나날 가운데서 이런 기인들이 종종 나타났다가는 세월 속에 사라져버리곤 했다. 그리고 평안하고 먹고살 만한 시절이 되면서부터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점점 자취를 감추게 되지 않았을까. 전선이 교착상태가 되고 나중에 휴전까지 되면서 미군 부대는 북쪽으로 이동해버렸고 철새처럼 그들을 따라왔던 사람들도 동네에서 사라져버렸다. 어른들은 시원해하고 섭섭해하기도 했다. 어쨌든 동네가 조용해진 대신에 한창 법석대던 호경기가 끝장이 났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무렵 영등포 시장의 길 건너편에까지 퍼져 있던 야시장의 활기를 잊지 못한다. 처음에는 밤에만 리어카에 헌책을 실은 책 노점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누가 궁리해 냈는지 아예 서가를 몇 개씩 내놓고 책을 가득가득 채우고는 빌려주는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에 책 한 권 값 정도를 맡겨 놓으면 대여비가 몇 푼 되지 않아서 읽은 책을 돌려주고 다시 빌려오고는 했다. 그들은 헌책을 사 모으기도 했는데 아마도 그들 중 일부는 나중에 가게를 빌려서 서점 주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 책들은 대부분이 전후에 개인 서가에서 쏟아져 나온 것들이었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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