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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물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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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안락의자 탐정(armchair detective)’은 범죄현장에 가지 않고도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이다. 다른 사람에게서 얘기를 듣거나 신문 기사를 읽고 추리한다. 1893년 아서 코난 도일이 발표한 『그리스인 통역』을 통해 알려진 말이라고 한다. 여기서 명탐정 셜록 홈스는 자신보다 더 뛰어난 형 마이크로프트를 가리켜 “만약 탐정이 의자에 앉아서만 추리해도 된다면 우리 형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탐정이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사 크리스티가 창조한 탐정 에르큘 포와로도 안락의자과(科)다. 현장에 가더라도 머리카락을 줍고 혈흔을 채취하지 않는다. 관련자들의 증언을 찬찬히 들은 후 ‘회색 뇌세포’를 움직여 멋진 논증을 완성한다.

1974년작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안락의자 추리’의 결정판이다. 폭설에 갇힌 유럽 횡단 열차에서 노신사의 시체가 발견된다. 승객 12명은 12개의 엇갈린 증언을 내놓는다. 하지만 그는 ‘모두가 범인’이라는 허를 찌르는 답을 이끌어낸다. 불행히도 현대의 수사는 이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용의자는 잡아떼기 일쑤고, 수사관의 판단력은 흔들리게 마련이다. 그래서 미국 과학수사드라마 ‘CSI’의 주인공 ‘길 반장’ 길 그리셤은 팀원들에게 강조한다.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것에 집중해, 증거 말이야.” 그가 믿는 건 증언이 아니라 증거다.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으면 기소할 수 없다. 설령 모든 정황과 수사관의 촉각이 한 사람을 가리킨다 하더라도. 81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고 여인 사건’이 좋은 예다. 고 여인은 시고모 등 세 명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됐다. “범행에 쓰인 슬리퍼와 피 묻은 스타킹을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자백이 유일한 증거였다. 하지만 자백이 강압수사의 결과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고 여인은 3년여 만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뭔가를 주장하려면 증거를 내놔야 한다는 건 상식이다. ‘부적절한 관계’를 부인하던 클린턴 전 대통령을 한 방에 보낸 건 그의 체액이 묻은 백악관 인턴 르윈스키의 드레스였다.

물증은 거짓말과 일방적 주장이 난무하는 혼란의 와중에서 우리를 지켜줄 수 있다. 천안함 사건 조사 결과가 발표됐는데도 좌초·충돌설이나 심지어 조작설도 나온다. 그것도 ‘안락의자’의 산물이 아니라 직접 가서 조사한 사람의 말이라니 더 황당하다. 증거가 거짓말을 한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대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할까.

기선민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