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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 '나쁜 남자' 11일 개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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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김기덕(42) 감독의 식욕은 왕성하다. 1996년 '악어' 이후 해마다 한편씩 신작을 내놓았다. 올해도 예외는 없다.

올 베를린 영화제(2월 6~17일) 경쟁부문에 초청된 '나쁜 남자'가 11일 개봉된다. 2000, 2001년 연속 베니스 영화제에 진출했던 '섬'과 '수취인 불명'에 이어 3년 내리 세계 3대 영화제에 진입하는 경사를 맞았다.

하지만 김감독의 국내 기반은 국제적 명성에 미치지 못한다. '나쁜 남자'의 시사회 직후 그는 "스탠더드(표준)한 것을 추구했다면 영화를 안했다. 그런 걸 기대한다면 내 영화를 보지 마라"라는 오만한 발언까지 했다.

특기 사항은 김감독의 식탐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에선 평범한 이웃을 찾기 어렵다.

그는 자살한 시체에서 지갑을 터는 남자('악어'), 파리로 유학갔다 사기꾼이 된 청년('야생동물 보호구역'), 폐쇄된 해수욕장의 창녀('파란 대문'), 낚시터에서 몸을 파는 벙어리 여인('섬') 등 소위 한계인들을 주로 그려왔다.

'나쁜 남자'도 이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6.25가 빚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은유한 '수취인 불명'에 이어 드라마를 강화한 까닭에 전작들보다 부담감이 적은 편이다. 예컨대 '섬'의 낚시 바늘 같은 엽기적 상징물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김감독은 이번에도 처음부터 관객을 당혹하게 만든다. 사창가의 깡패 두목인 한기(조재현)가 대낮 도로변에서 일면식도 없던 여대생 선화(서원)에게 강압적인 키스를 퍼붓는다. 선화에게서 심한 욕설을 들은 한기. 그는 치밀한 계략을 꾸며 선화를 창녀촌으로 팔아넘긴다.

감독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남녀를 통해 이른바 '운명의 장난'을 해부한다. 너저분한 환경에서 성장한 한기, 데이트를 즐기며 별다른 걱정없이 살아가는 청순한 여대생 선화, 그들의 돌발적 만남과 끈질긴 악연을 앞세우면서 "삶이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한기에게 선화는 '다른 세상'의 등가물이다. 가까이 가고 싶지만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존재다. 신분의 차이가 빚은 계급간 단절이랄까. 때문에 한기는 폭력으로 선화를 굴복시킨다.

그렇지만 한기 또한 자신이 행사한 폭력의 희생자로 묘사된다. 한기가 선화에게 접근하는 유일한 통로는 선화의 방 옆에 마련한 밀실의 거울을 통해 선화가 매춘하는 모습을 훔쳐보는 것. '나쁜' 남자가 아니라 '불쌍한' 남자란 생각마저 든다.

내내 한마디 말도 없이 강렬한 눈빛만을 뿜어댔던 한기가 막바지에 뱉은 귀곡성 같은 한마디, 즉 "깡패 새끼가 무슨 사랑이야"란 외침이 잊혀지지 않는다.

10일 막 내리는 드라마 '피아노'로 안방 극장 만년 조연에서 스타급 배우로 부상한 조재현의 '내공'이 배어나온다.

감독은 예전처럼 가학과 피학이 교차하는 인간 관계의 폭력성을 주시한다. 그리고 이번엔 자신을 팔아넘긴 한기를 사랑하게 되는 선화를 통해 운명이란 문제도 건드린다.

작은 트럭을 몰고 다니며 바닷가 남자들에게 여인의 몸을 팔고, 또 그 돈으로 삶을 끌어가는 그들의 행로를 먼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마지막 장면은 아름답기보다 섬뜩하다. 정녕, 그런게 삶일까. 운명이란 상투적 단어는 그들의 불가해한 화해를 설명하기에 미흡하다. 18세 관람가.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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