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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관령의 중공군 (98) 새까맣게 몰려온 중공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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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국군 5사단과 7사단을 거느린 미 10군단, 국군 9사단과 3사단을 거느린 국군 3군단, 수도사단과 11사단을 보유한 나의 국군 1군단이 이를 맞이할 때였다. 병력 수에서는 적이 월등히 앞서고 있었다. 중공군의 1개 보병사단 병력은 보통 1만6000명가량이다. 그들의 18개 사단이면 어림잡아도 29만 명, 게다가 북한군 3개 군단까지 가세했다.

1951년 춘계 공세를 앞둔 중공군의 모습. 이들은 그해 5월 주력부대를 동부전선으로 옮겨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떨어졌던 국군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30만 병력을 동원한 춘계 5차 2단계 공세에서 중공군은 강원도 산악지역을 넘어와 파상공세를 펼쳤다. [중국 해방군화보사]

51년 5월 16일 이후 벌어진 이 공세는 중공군 5차 2단계 공세에 해당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중공군의 대공세는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펼쳐진 중공군의 공세는 국지적인 고지쟁탈전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 전투는 매우 중요했다. 가장 아팠던 것은 국군의 패퇴다. 6·25전쟁 기간 중 국군은 이 전장에서 씻을 수 없는 불명예를 기록했다. 전투에서 국군이 이렇게 소극적이며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그 전투는 이른바 ‘현리 전투’다. 장소는 강원도 인제군의 현리다. 당시 국군은 그리 뛰어난 군대는 아니었다. 전투 경험이 별로 없었고, 무기와 장비를 동원한 현대 전쟁의 개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전선을 지휘하는 지휘관이라고 해봐야 모두 젊은 나이에 광복군과 일본군·만주군에서 소규모 부대를 이끌었던 군사적 경험이 대부분인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실수가 잦았다. 그 점에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무서운 여러 싸움에서 국군이 강한 정신력으로 맞서며 대한민국을 지탱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정신력만으로는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었다.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한데 뭉치면서 치열한 전선에서 미숙함을 보여주곤 했다. 특히 현리 전투에서는 그런 미숙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점에서 이 현리 전투의 상황을 상세하게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느낀다. 개인의 잘잘못을 따진다는 차원보다는, 경험이 적고 두려운 전쟁터에서 싸움을 어떻게 치러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다. 지금의 대한민국 군대에도 이런 경험은 필요하리라고 생각한다.

참 묘하게 엇갈리는 상황이 나타났다. 우선 미군이다. 51년 4월 11일 한국전쟁을 이끌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해임됐다. 그 뒤에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인물이 그 직전까지 미 8군을 이끌었던 매슈 리지웨이 장군이다. 리지웨이 후임으로는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이 왔다.

한국 전선에서 막대한 병력과 화력을 움직이는 미군의 총지휘부가 바뀌던 시점이었다. 밴플리트 장군은 부임하자마자 중공군 공세를 막아야 하는 입장이 됐다. 그는 그 뒤에도 줄곧 한국에 애정과 관심을 기울였듯이, 부임 초반부터 한국의 실정을 가능하면 한국인의 입장과 시각에서 다루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는 중공군 5차 1단계 공세에서 수도 서울 사수 작전을 펼쳤다.

그 덕분에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은 이렇다 할 만한 전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후 중공군은 양동(陽動) 작전을 의도적으로 펼쳤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군과 연합군이 보유한 화력의 막대함을 나름대로 충분히 저울질했던 중공군이었다. 그들은 5차 1단계 공세 뒤 서부 전선을 공격하는 척만 했을 수 있다.

중공군은 서부에서 교착된 전선을 놔둔 채 주력을 빼돌려 동부전선으로 이동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중공군의 움직임은 여러 가지 첩보와 정보로 미군 지휘부에 전해졌지만, 서울 사수라는 명분을 중시하면서 한국 전선에서의 중공군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밴플리트 장군은 이를 다소 소홀히 취급했을 가능성이 크다.

중공군은 그에 비해 전체적인 판도에서 한국 전선을 크게 삼키려는 계산을 했을 수도 있다. 일단 서부전선은 뚫기가 어렵다는 점을 알고, 동부전선으로 우회해 그곳의 국군을 무너뜨린 뒤 남진함으로써 종국에는 서부 지역의 미군 방어선을 뒤흔들면서 주도권을 잡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공군의 이런 의도는 실패했다. 초반의 우세한 공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대관령 이북에서 국군과 미군의 방어에 막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미군의 강력한 반격에 오히려 심각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그 뒤 한반도에서 미군과 중공군의 양대 참전 세력은 ‘소모전’만을 벌였다. 중공군은 마침내 이 땅에서의 전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휴전 테이블에 나서게 된다. 약 1년 동안 이어졌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이로써 큰 고비를 넘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그 전기가 바로 현리 전투와 그 뒤 이어지는 긴박한 싸움이다. 그 자세한 내막은 이렇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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