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아뿔사! 애주가들 입맛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5면

남아도는 쌀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있는 정부당국은 최근 소주원료 공급업체들에게 주정(酒精=에탄올)원료로 쌀을 대량 사용할 것을 강력 주문하고 나섰다.

그러나 정작 주정을 갖고 술을 만드는 소주제조 업체들의 반응은 시큰둥 하다. 제조원가만 올라갈 뿐 품질향상에는 아무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다.

국내 술들중 가장 많이 팔리는 진로의 '참이슬', 두산의 '山' 등은 원료의 성분이 녹아들어 맛과 향을 내는 증류주가 아니라 희석식소주다.

희석식이란 99. 9% 에틸알콜인 주정에 물과 향료를 물리적으로 배합해 만드는 방식이기 때문에, 주정 원료가 쌀이든 고구마든 상품의 질에는 변화를 주지 못한다.

60년대 초, 식량난에 허덕이던 당시 박정희정권은 양곡관리법을 만들어 소주제조에 곡물을 일체 쓰지 못하도록 했다.

대신 태국등지로부터 값싼 절간고구마, 타피오카등을 수입해 희석식 소주를 제조토록 했는데, 아뿔싸! 그것이 애주가들의 입맛에 그만 너무 깊게 길들여지고 말았다.

소주메이커들은 당장이라도 쌀이 살아 숨쉬는 증류주를 듬뿍 만들어 정부에 아부(?)도 하고, 비싼값에 팔고싶어도 애주가들의 변해버린 입맛을 바꿀 묘책이 없어 고심하고 있다.

10여년전 진로가 '비선'이라는 상표의 한차원 수준높은 증류식소주를 내놓은 적이 있었지만, 증류과정에서 생기는 '불냄새'에 익숙치 않은 애주가들로부터 뜻밖의 외면을 받곤 접어버렸다.

그러다보니 일제(日帝)치하에서도 벌였던 '술 내용물'에 관한 선전을 2000년대 와서도 못하고있다. 프랑스 포도주의 경우 원료인 포도의 생산년도, 생산지역등을 대문짝만하게 광고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는 기껏해야 '좋은 물로 빚었다'는 정도가 고작이다.

국내 최초의 술 광고는 1920년7월 삿포로맥주(現하이트맥주 전신)가 시작한 '1甁의 營養量은 牛肉半斤과 가틈(같음)'이라는 문구로 출발했다. 당시 식량형편이 어떠했는지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4년후 경제가 좀 좋아졌는지 기린맥주(現OB맥주전신)는 '녀름밤 일을 맛치고 浴湯에 드러가서 麥酒를 마시고 자는 快感'이란 광고를 일간신문에 내보내면서 '멋'을 보탰다.

그 이듬해 시작된 포도주 광고부터는 오늘날 유럽의 술들처럼 '건강'또는 '품질'을 강조하고 있는점이 발견된다.

아아! 赤玉朝夕의 一杯! 健康으로 가는 길, 말로는 쉬워도 行하기는 어렵다-赤玉포트와인' '第一조흔 淸酒, 第一 잘팔니는 淸酒, 品質 第一等, 다만 그것만이 자랑이 올시다려-사구라 正宗'

국내최초의 술 CM송을 만든 진로는, 두꺼비가 여러 양주들과 달리기를 벌여 우승하는 극장 만화영화를 시도하면서 독과점시대를 열어갔다. 그 속에서 가격과 유통망에 열세일 수 밖에 없는 지방명주(銘酒)들은 설자리를 잃고 만다.

다행히 최근들어 국제경쟁력 가능성이 큰 독특한 술들이 빠른 속도로 시장을 넓혀나가고 있다. 전남이 연고지인 보해양조는 매취순의 원료로 쓰이는 해남지역의 매실열매가 세계최고 품질이라는 점에 착안, 社力을 온통 퍼부으며 매실주가 건강에 좋다는 점을 광고하고 있다.

뉴라운드 시대에 농민들의 시름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선 이처럼 그 지방 최고의 쌀 또는 과실등을 주원료로한 지방 銘酒들이 쏟아져 나와야한다. 당국과 업계는 지금부터라도 지방명주의 개발.확산에 힘을 다시 모아야할 필요가 그래서 절실하다.

김영종<이코노미스트 주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