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예수의 마지막 유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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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충무로 시사회장은 썰렁했다. '예수의 마지막 유혹'이란 영화의 연내 개봉이 무산됐다는 얘기를 듣고 "또 못보는가"하고 쫓기는 마음에 부랴부랴 수소문해 찾았다. 광고 없이 바로 시작한 영화, 엉뚱하게 자막부터 뜬다.

'이 영화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므로 허구이고 특정 종교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밝혀둡니다.'

*** 기독교계 일부 “신성 모독”

영화가 신성을 모독한다는 기독교의 비난과 상영반대 움직임을 의식해 넣은 자막이다. 비슷한 내용의 자막은 두차례 반복된다. 파란 스크린에 어색하게 떠오르는 한글 자막은 올해 영화를 수입한 코리아준에서 영상물 등급 심의를 신청하면서 만든 것. 이어지는 영어 자막은 1988년 영화를 만든 마틴 스코시즈 감독이 머리말처럼 새겨넣은 것이다. "기독교의 양해를 구하는 내용의 자막을 두번씩이나 보여주다니, 역시 상당한 문제작인가 보군."

자막이 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기대감이 적지 않았다. '택시 드라이버'로 유명한 스코시즈 감독의 대표작. 98년 개봉하려다 기독교계 일부의 반대로 무산됐던 영화. 21세기를 맞아 다시 상영을 준비했으나 여전한 기독교계 일부의 반대로 연말 개봉이 다시 무산된 문제작. 개봉되지도 않았고, 비디오도 안나와 영화를 본 사람이 거의 없는데도 이렇게 시끄러울 정도라면…, 당연히 찾아볼 만한 영화가 아니겠는가.

결론부터 말해 기대는 무산되고 의문만 남았다. "이 영화가 그렇게 기독교계를 들쑤셔 놓을 만큼 반(反)기독교적인가?"

한마디로 전형적인 예술영화, 다시 말해 별 재미 없는 영화였다. 예수님을 재해석하려는 감독의 철학이 촘촘히 박혀 무거웠다.상영시간은 2시간40분 정도.

앞의 두시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의 과정인데, 대부분 성경의 내용과 비슷했다. 감독의 철학이 깔려있긴 했지만 대체적인 내용이 성경에서 읽고 들은 얘기들이라 신선하지 못했다. 미션스쿨 재학시절 성경시간에 본 교육용 필름 같았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마지막 힘겨운 숨을 몰아쉬는 순간, 성경에 없던 수호천사(사탄이 변신한 소녀)가 갑자기 나타났다.

"이런, 기발한 해석이군."

이때부터 영화속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수호천사가 "이제 하나님에 대한 복종과 믿음을 충분히 보여주었으니 십자가에서 내려와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을 살아도 된다"고 유혹한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예수님은 십자가를 내려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한다. 이어 인간 예수는 지극정성으로 자신의 상처를 닦아주던 아내와 육체적 관계를 갖는다.

기독교계에서 가장 발칙하고 불온하게 꼽는 장면. 그런데 평범한 인간의 길을 택한 예수를 상정한 영화 속의 일이라 생각하면 그냥 자연스러운 흐름에 불과하다.

마지막 반전이 극적이다. 죽음을 앞둔 노년의 예수를 찾아온 유다가 "왜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지 않았는가"를 따지면서 "수호천사는 사탄"이라고 알려준다. 비로소 '마지막 유혹'임을 깨달은 예수는 병약한 몸으로 땅바닥을 기어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간다.

*** 돌아온 탕아처럼 인간적

다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 40분 전의 장면으로 돌아간다.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삶은 십자가의 예수님이 잠시 꾸었던 꿈이나 상상이었던 것이다. 비로소 십자가의 죽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인 예수님은 "다 이루었도다"며 웃는다.

예수님은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온 셈이다. 마지막 유혹은 '돌아온 탕아'처럼 인간적이고 감동적이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 문제를 못느끼는 것이라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이전보다 기독교에 더 가까워졌다는 느낌은 확연했다.

'이 글은 아무 종교도 없는 기자가 예수님을 소재로 한 영화 시사회에 참석하고 난 소감을 적은 것으로 특정 종교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밝혀둡니다.'

오병상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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