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방콕 시민 “깨지기 쉬운 유리같은 평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6면

방콕=정용환 특파원

군경의 강제 진압으로 태국 반정부시위 사태가 일단락된 지 하루가 지난 20일 수도 방콕이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태국 정부는 일요일인 23일 새벽까지 야간통행금지령을 연장하고 시위대가 탈취해간 총기 수거 등 사태의 마무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방콕 시민들은 “깨지기 쉬운 유리 같은 평온”이라며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무력을 동원한 정부의 강제 진압 방식을 놓고 ‘레드 셔츠(탁신을 지지하는 반정부 시위대)’ 상당수가 반발하고 있어 사태의 불씨가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20일 태국 소방대원들이 방화로 불타고 있는 방콕의 대형 쇼핑센터 ‘센트럴월드’에서 진화작업을 벌이고 있다. 반정부 시위대는 군경의 강제 진압작전이 벌어진 19일 이곳에 불을 질렀다. 소총 등으로 무장한 일부 시위대는 진압작전 이후에도 게릴라식 공격을 계속하고 있다. [방콕 AP=연합뉴스]

20일 오전에도 방콕에선 총성이 그치지 않았다. 시위대가 해산했지만 일부 무장한 레드 셔츠는 게릴라식 공격을 산발적으로 벌였다. 이들은 고층 건물에 숨어 총을 쏘거나 주요 건물에 불을 질렀다. 전날 밤 센트럴월드·증권거래소 등 27곳이 방화로 불탄 데 이어 이날에도 10곳이 더 공격을 받았다. 레드 셔츠의 저항은 탁신의 정치적 본거지인 북부 농촌 지역에서도 간간히 이어졌다.

군 대변인 산세른 카우캄네르드는 “조사 결과 시위대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 방화를 부추겼던 사실이 드러났다”며 “정부 청사와 방송국·빌딩 등 모두 39곳이 공격 목표였다”고 밝혔다. 산세른은 이어 “소방수들이 불을 끄려고 해도 피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신속한 진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덧붙였다.

◆시위 불씨 여전=정치분석가들은 “일단 시위 사태는 진정됐지만 시위를 촉발한 불씨가 그대로 잠복해 언제든지 시위 사태는 재발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농촌과 도시의 빈민층이 주축이 된 레드 셔츠와 엘리트·기득권 계층인 이른바 ‘옐로 셔츠’ 간의 갈등이 이번 유혈 강제진압을 계기로 훨씬 더 커졌다는 것이다. 레드 셔츠 측은 옐로 셔츠를 배경으로 하는 아피싯 웨차치와 총리가 선거 없이 야합으로 정권을 가로챘다며 즉각적인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을 요구하며 3월 중순부터 방콕 시내에 집결해 반정부 시위를 벌여왔다. 지금까지 모두 82명이 사망하고 1800여 명이 다쳤다. 이 중에는 외국 기자 2명도 포함돼 있다. 시위대 해산에 성공한 이번 강제진압이 시작된 19일 이후 사망자는 14명, 부상자는 130여 명으로 집계됐다.

20일 태국 정부는 방콕 일원과 23개 주에 대해 이날 오전 6시까지 발효했던 야간 통행금지령을 사흘 더 연장했다. 23일 오전 5시까지 일반인의 야간 통행이 전면 금지된다. 태국 중앙은행은 안전을 이유로 20∼21일 태국의 은행들이 임시 휴업하도록 했다. 전철(BTS) 역사는 폐쇄했다. 방송국들은 정규 방송을 전면 중단하고 실시간으로 치안 상황을 전해주는 특별 방송만 내보내고 있다.

◆정국 안정 불투명=2개월이 넘도록 수도의 도심을 마비시킨 시위 사태가 종결됐지만 이 과정에서 정국 관리의 허점을 드러낸 아피싯 총리는 가장 큰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협상 등 정치적 해법이 아닌 강제진압으로 시위대를 몰아냈기 때문에 안팎의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방콕의 외교 소식통은 “아피싯 총리가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 해법은 모두 시도해 봤다”며 “진압에 회의적인 군 실세 아누퐁 파오친다 육군 참모총장을 밀어붙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태국 정가에선 아피싯 총리가 이번 시위 사태에서 드러난 태국 사회의 계층·지역·도농 간 갈등을 해소하고 국민화합이라는 큰 과제를 풀어낼 수 있는 적임자인지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있다.

콥삭 삽하와수 총리 비서실장은 "국가 화합을 위한 계획을 추진할 예정이며 이 계획을 마무리하는 데는 4개월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국가 화합 계획이 목적을 달성하면 총선이 실시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아피싯 웨차치와 총리가 적절한 조기 총선 시기를 결정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용환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