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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장규 칼럼

전경련이여, 차라리 해산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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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1년 전 뉴욕특파원으로 부임해 처음 당한 골칫거리가 전임자한테 물려받았던 현대 쏘나타였다. 걸핏하면 시동이 꺼지는 차를 몰고 어찌 살벌한 맨해튼 취재를 다닌단 말인가. 애물단지를 팔아치우느라 고생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랬던 쏘나타가 지금 미국에서 도요타의 캠리, 혼다의 어코드 같은 일본의 명품 차들을 제치고 최고 인기 차로 올라섰다고 하니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 상품의 승리를 넘어 국가 자존심 차원의 쾌거다.

*** 대기업 칭찬은커녕 비난의 표적

그런데 이런 현대자동차를 한때 한국 정부가 앞장서서 없애려는 정책을 폈던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1980년 정부는 '한국자동차산업은 희망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현대.대우.기아를 하나로 합쳐 GM한테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자동차산업은 대만처럼 선진국 자동차의 조립생산이나 해야 한다는 정책판단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당시 상공부 장관한테 시키는 대로 하겠다며 각서까지 썼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텼다. "외국인한테 경영권을 넘겨주면 자동차 수출은 끝"이라며 우겼다. 한국 정부의 약속을 믿고 거저 먹는 줄 알고 덤볐던 GM은 현대의 막무가내에 화를 내며 돌아가버렸다. 이때 정부계획대로 됐다면 지금의 자동차산업은 없다.

자동차산업만이 아니다. 코리아의 브랜드 이미지를 세계 일류로 끌어올린 반도체 산업도 아예 통째로 없었을 뻔했다. 80년대에 들어오면서 삼성이 반도체산업에 투자를 늘려나가자 많은 사람이 곱게 보지 않았다. 더욱이 당시 분위기가 과잉투자, 중복투자에 하도 혼이 났던 터라 리스크 큰 사업에 대한 경계심이 유난히 고조됐을 때였다. 정부는 물론이고 학자들조차 "저러다간 삼성이 기존 사업체들마저 모조리 거덜내겠다"며 우려했다. 급기야 재무부가 나서서 삼성의 반도체사업에 대한 은행대출 중단조치를 취했다. 삼성으로선 날벼락이었다. 정부가 자금지원을 늘려주기는커녕 돈줄을 끊는 조치를 취했으니 말이다. 결국 이병철 회장은 그룹 계열회사들을 총동원해 올인 작전으로 정부의 목조르기를 극복해 나갔다. 지금처럼 내부거래 규제가 심했다면 그나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자동차와 반도체산업이 없는 한국 경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 두 산업을 결정적인 순간에 없애겠다는 정책을 결정하고 실제로 추진했다. 정주영 회장이나 이병철 회장이 죽기살기로 정부정책을 어겼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기업가 정신으로선 드라마 같은 성공사례였던 반면, 한국 정부의 산업정책사로 볼 땐 치욕의 기록이다. 돌이켜 보면 정부가 기업활동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해서 잘된 게 별로 없다. 옛날엔 포항제철도 건설하고 수출금융이다, 중화학건설이다 하면서 정부가 기관차 역할을 했지만, 그런 역할도 박정희 시대로 끝났다. DJ 때도 빅딜 운운하며 나섰다가 일만 그르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기업정서는 세계 최악이다. 기업 스스로의 과오도 있었지만, 정부가 그렇게 만들어 온 측면도 많았다. 특히 반기업 정서는 노무현 정부 들어서 부쩍 더 심해졌고, 이런 풍조는 한참 갈 것 같다. 이럴 때야말로 전경련(全經聯)이 나서 기를 쓰고 재계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데, 전경련 자신이 오래전부터 동네북 신세가 돼 버렸다. 맷집만 좋아졌지 약발이 안 듣는다. 출자총액제한이나 공정거래법 문제로 최근에도 사방팔방으로 뛰었지만 정부나 국회는 콧방귀도 안 뀌지 않았나. 걸핏하면 시민단체나 정치인들에게서 재벌 앞잡이 소리나 듣고, 돈은 돈대로 쓰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격의 타깃이 되는 어리석은 일을 왜 되풀이하는지 모르겠다.

*** 연구재단 변신이 훨씬 나을 것

재계도 이참에 발상을 과감하게 전환하는 게 어떨까 싶다. 전경련부터 발전적으로 해산해 스스로의 로비창구를 폐쇄해 버리는 것이다. 주요 업무는 대한상의나 경총 등에 넘기고, 지금 예산으로 권위 있는 연구재단으로 변신하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전경련이 없어지면 오히려 대기업 공격에 앞장서온 사람들이 가장 서운해 할 것이다. 공격의 단골목표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므로. 걸핏하면 전경련을 걸고 넘어졌던 정부 또한 매우 불편해 할 것이다.

이장규 경제전문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