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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부터 읽을까] 지금 왜 생태적 삶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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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찌개에 들어갈 생태도 골프를 치나.대형댐으로 계곡을 막거나 천혜의 갯벌을 매립하는 자본도 핵폐기물을 자손만대에 물려주는 자본과 더불어 걸핏하면 '환경'을 들먹이더니, 세금 받아 행정하는 서울시까지 난지도 쓰레기산에 짓겠다는 골프장에 '생태'를 갖다 붙인다.

'생태'가 더 근본 개념이라는 풍문을 들은 것일까.

환경에 이어 생태까지 팔아먹는 세태가 차라리 안쓰럽지만,생태학을 연구한다며 팔도강산을 누비던 필자도 어렴풋하게나마 생태를 이해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다.녹색평론사에서 1993년 발간한 『녹색평론선집1』을 만나지 못했다면 교란되는 생태계를 여전히 대상화하며 학자연하고 있을지 모른다.

도시림은 물론 국립공원까지 분별 없이 절딴내는 개발행위에 온몸으로 대응하다 분노하던 이경재는 『우리 땅 곳곳 아프지 않은 곳이 없네』(푸른미디어,2000)하며 탄식하면서 참여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지만, 마이클 코헨이 『우리는 너무 오래 숲을 떠나 있었다』(도솔,2001)고 안타깝게 생각하듯, 도시생활에 길들인 대부분의 독자들은 사실 어떻게 어느 정도 참여해야 가시적인 성과가 있을지 거의 모른다.

이미 구속돼버린 문명세계를 전부 포기해야 하는지, 신자유주의 경제의 역사적 고찰과 그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해부하는 이가옥과 고철기가 『공동체 경제를 위하여』(녹색평론사, 2001) 대안경제를 제안하고 있듯이, 가치가 있는 일부 문명은 어니스트 칼렌바크가 상상의 나래를 편 『에코토피아』(정신세계사,1991)처럼 더욱 계승 발전시켜야 하는지,도무지 감을 잡지 못한다.

아리요시 사와코는 한 바가지의 물과 한숨의 공기,그리고 한 톨의 곡식도 안심할 수 없을 뿐더러 오염물질 사이의 상관관계는 짐작조차 불가능한 산업사회의 실태를 『복합오염』(장락,1994)이라고 요약했지만,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로 요약할 수 있는 중앙집중적 공급체제에 더욱 억압되는 처지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와 ISEC가 통박한 『허울뿐인 세계화』(따님,2000)를 곱씹고 앉아있을 수만은 없다.

가족이 없어 그만큼 자유로웠던 1백50년 전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처럼 최소한의 돈만 가지고 『월든』(이레, 1993) 호수와 같이 한적하고 깨끗한 시골로 들어가 자연과 벗하며 유유자적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문명의 천박성부터 깨닫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겠지만, 요사이의 환경사정은 무언가 행동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심각한 지경인 것이다. 월드워치연구소의 앨런 더닝이 『소비사회의 극복』(따님,1994)을 위한 실천 덕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듯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 행동해야 한다.

유영초는 『더럽게 살자』(두레시대,1996)고 외친다.더럽게 사는 자세가 진정 깨끗한 삶이라고 주장한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냄새까지 없는 핵폐기물이 깨끗한 거냐고 물으며 밥이 똥이 되고 똥이 또 밥이 되는 순환의 가치, 배설의 생태적 중요성을 설파한다.

일찍이 장일순 선생이 주장하듯 『나락 한알 속의 우주』(녹색평론사,1997)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진 자신의 편의를 과감히 버리라고 주문한다.『자동차,문명의 이기인가 파괴자인가』(따님,1996) 묻는 스기타 사토시는 이기적 기계문명의 대표선수격인 자동차말고 자전거를 타거나 함께 걷자고 제안하고, 불안 심리를 조성해 환자를 양산하거나 환경문제의 근본적 고민도 없이 말초적 치료만을 강요하며 진료비부터 챙기려드니『병원이 병을 만든다』(형성사,1987)에서 이반 일리히는 자신의 건강은 스스로 챙기자고 권한다.

공동체가 살아 있는 민족, 하지만 서구문명에 급속히 오염되는 라다크를 둘러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진정한 미래의 대안은 과거의 삶에서 찾아야 한다며 『오래된 미래』(녹색평론사,2001)를 이야기한다.

호세 루첸베르거와 프란츠 테오 고트발트가 현대인의 덕목으로 『지구적 사고, 생태학적 식생활』(생각의나무,2000)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지만,평생을 농촌운동에 매진한 천규석 선생은 『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실천문학사, 1999)라면서 농자천하지대본이었던 사회로 귀환하자고 도시인들을 설득한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일일까.늦었다는 걸 깨닫는 지능이 있고 반성할 줄 아는 인간이 아직 살아있는 데에서 『희망의 이유』(궁리, 2001)를 찾는 제인 구달도 그렇듯이, 생태주의는 사실 낙관주의자들의 몫이다. 비관적이라면 책도 쓰지 않았고 글도 읽지 않을 것이다.

힘겹고 성과가 당장 눈에 들어오지 않는 행동에 나서려하지 않을 것이다.

박병상 <인천 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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