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동화로 보는 세상] 겨울 이야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이제 겨울입니다. 곧 하얗고 보드라운 눈, 보석처럼 영롱한 육각형의 결정체가 쌓이고 쌓여 세상을 하얗게 뒤덮을 겁니다. 조금 더 기다리면 색색의 불빛이 반짝이는 크리스마스까지 있어 그 기쁨은 더할 겁니다.

하지만 겨울의 진짜 매력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차가운 바람, 굴뚝의 하얀 연기, 얼어붙은 땅바닥. 초등학교 때를 생각해 보면 겨울의 참맛은 그 살 떨리는 추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온이 내려가면 집안마저 서늘한 기운이 감돕니다. 옷을 껴입고 중무장을 한 채 골목으로 나가 보면 어느새 아이들이 차가운 공기를 휘저으며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모두들 입으로는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별 일도 아닌 일에 열심입니다. 물론 그때는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지요. 그 시절 아이들은 썰매를 고치기도 하고, 땅바닥에 선을 긋고, 어디선가 가져온 돌을 부수어 이상한 모양을 만들며 놀았습니다. 장갑도 끼지 않은 손은 퉁퉁 붓고 군데군데 갈라지기도 했습니다. 콧물이 주룩 흘러나오기도 하지만 놀이에 열중하다 보면 그런 것을 느낄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낙원이 따로 없었습니다. 집 안에 있을 때는 자꾸만 이불 속으로 파고들고 싶지만 한바탕 찬바람에 몸을 맡기다 돌아오면 여기가 바로 ‘나의 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집’엔 가족이 있었습니다. 늘 티격태격하는 형제도 있고 먹을 것을 챙겨주는 어머니, 밥숟갈을 제일 먼저 드시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바깥의 사나운 추위를 막아주는 집 안에서 자질구레한 놀이에 빠져 있다 보면 조그만 목소리로 오가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들립니다. 제각각 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 따로 방이 있다고 해도 어느 순간 어머니, 아버지가 있는 방에 몰려 있게 됩니다. 그 때 들은 이야기들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적당히 낮은 목소리, 뜨뜻한 방바닥, 알쏭달쏭 미래에 대한 기대감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겨울방』에는 어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엘든이 있습니다. 겨울이 되기까지 먼 곳 미국이나 이곳 한국이나 어른들은 쉴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냅니다. 그리고 추위를 피해 따뜻한 방에 모여 지난 일들을 하나 둘 되새깁니다. 지은이 게리 폴슨은 시골 마을의 삶을 눈에 보일 듯 손에 잡힐 듯 상세하게 묘사합니다. 신기하게도 우리의 시골 모습과 무척 흡사합니다. 봄·여름·가을을 보내고 농장에 사는 가족들이 한데 모입니다. 겨울만 되면 오글오글 모여있기 때문에 ‘겨울방’이라 부르는 곳. 그 방에서 엘든과 형은 데이비드 아저씨와 넬슨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하지 않은 인생 이야기들을 들으며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자라납니다. 비록 ‘나의 집’에서는 그런 친절한 노인들의 이야기는 없었지만 책을 읽는 동안 구수했던 옛 냄새만큼은 똑같이 맡을 수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이라고 해서 아이들의 놀이무대가 골목과 바로 앞의 눈썰매장 따위에서만 맴돌지는 않았습니다. 멀리 야산이나 한참 떨어진 알 수 없는 곳에도 가곤 했습니다. 찬바람을 뚫고서. 출발할 때 마음은 가벼웠지만 추위가 옷 속으로 파고들 때쯤이면 따뜻한 집 생각이 간절하고, 손발이 꽁꽁 얼기 시작하면 머릿속은 흐리멍덩해집니다. 그곳에 가서 무얼 했는지도 도통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마도 잿빛 돌멩이를 주워오거나 집 앞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나뭇가지를 잘라왔던 것 같습니다. 배도 고프고 온몸이 반쯤 마비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점점 급해집니다. 마침내 동네가 눈에 들어오면 갑자기 으쓱해져서 그날의 수확물인 돌멩이 등을 하늘로 높이 쳐들어 가만히 감상하는 시간을 갖지요. 무언가 내 힘으로 해냈다는 뿌듯한 느낌을 즐기면서.

『당주의 숲』에는 당주의 모험이 그려져 있습니다. 할아버지를 따라 겨울 산속으로 들어가 어리둥절해 하며 헤매다 돌아내려오고 말지만 당주에게 그 모험은 작은 성장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곁에 있지만 거대한 숲이 주는 공포, 차가운 눈과 추위는 당주만의 시련입니다. 초등학교 고학년들을 위한 책 『늑대에겐 겨울이 없다』에서도 겨울의 추위가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저비스, 그리고 마찬가지로 편안하게 살고 싶어하는 몇 사람이 275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추위와 공포를 뚫고 먼 길을 갑니다. 다시 한번 추위가 삶에서 어떤 시련이며 기회인지 느끼게 하는 책입니다. 겨울의 추위는 피해가고 싶은 것임이 분명하지만 그 추위로 인해 우리는 더욱 단단해질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겨울은 영롱하고 신나는 계절일 뿐 아니라 추위라는 시련과 싸우며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의 계절’입니다.

이형진(화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