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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의 홍명보’로 돌아 와야죠? 코트 떠나는 원조 오빠 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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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최근 은퇴를 발표한 이상민, 문경은, 우지원(왼쪽부터)이 농구공을 잡고 활짝 웃고 있다. 문경은과 우지원은 전력분석관으로 제2의 농구인생을 시작한다. 이상민은 8월에 가족과 함께 미국 연수를 떠날 예정이다. [김태성 기자]

“뭘 자꾸 웃으라고 하세요? (웃는 사진 나가면) 은퇴하는 게 너무 좋아서 웃는 줄 알 것 아니에요.”

사진기자를 향한 문경은(39)의 농담에 이상민(38)과 우지원(37)이 나란히 웃음을 터뜨렸다. 1990년대 중반 연세대에서 나란히 뛰면서 농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이들은 최근 한 달 사이에 차례로 은퇴를 발표했다. 이상민이 지난 달 은퇴 선언을 한 뒤 이달 초 우지원에 이어 문경은도 은퇴를 결정했다.

14일 문경은의 은퇴 기자회견을 앞두고 인터뷰에 응한 세 명은 “함께 모인 게 정말 오랜만”이라며 반가워했다. 이들은 연세대 유니폼을 입고 93~94 농구대잔치 우승을 일궈냈다. 당시 대학농구 스타들의 폭발적인 인기는 1997년 프로농구를 출범시킨 기폭제였다. 프로농구 1세대 스타인 이들은 이제 코트를 떠나 제2의 농구인생을 시작한다.

# 서태지와 인기 경쟁하던 그 시절

“매일 부대 자루로 팬레터와 선물이 배달됐죠. 은퇴하니까 새록새록 옛날 생각이 나요.” 연세대 농구팀의 인기를 회상하는 문경은의 말에 이상민이 맞장구쳤다. “프로필에 ‘취미는 독서’라고 쓰면 책 선물이 쏟아졌어요.” 우지원은 “하이틴 잡지에 ‘이달의 인기스타 순위’가 있었는데, 연세대 농구팀이 서태지와 아이들과 1위를 다퉜죠”라고 말했다. 아직까지 이들의 인기를 능가하는 스타를 찾기가 어렵다. 최근 농구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으면서 어린 선수들이 이전만큼 큰 관심을 끌지 못해서다. 지금까지 치러진 아홉 차례의 프로농구 올스타전 팬투표에서 1위는 늘 이상민이었다. “그거 비정상 아닌가요”라는 우지원의 말처럼 이들 앞에는 지도자로서 새로운 스타를 발굴해야 하는 숙제가 놓여 있다.

이들이 대학 시절부터 큰 인기를 얻은 게 우연이었을까. 이상민은 “연세대가 왠지 뺀질하고 잘 놀 것 같은 이미지죠? 사실 우리는 대학 때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 10시간 넘게 운동했어요. 요즘 학생들은 그에 비하면 노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 다시 바닥부터 시작

때로는 짜릿한 우승을, 때로는 슬럼프와 원치 않는 트레이드로 희로애락을 겪었지만 그래도 그동안 이들은 ‘스타’였다. 하지만 이제는 또 다른 출발선에 섰다. 문경은과 우지원은 각각 SK와 모비스의 전력분석관으로 변신한다. 이상민은 8월에 2년간 미국 연수를 떠날 계획이다.

스타 출신이라고 해서 쉽게 코치 자리를 꿰차는 시대는 지났다. 이들은 ‘폼 나는’ 지도자 자리에서 출발하지 못하는 서로의 사정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문경은은 “지금까지 스타라고 대접만 받고 살았다면 이제는 누구를 대접해야 하는 입장이란 걸 알아야 돼”라고 강조했다. 문경은은 시즌을 마친 후에도 새벽 운동을 하는 후배들의 슛 폼을 일일이 잡아주고 있다.

우지원은 “나도 밑바닥부터 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일이야. 경은이 형은 전력분석팀에 후배가 두 명이나 있는 ‘팀장’이지만 나는 깐깐한 유재학 감독님, 방열 고문을 모셔야 하는 말단이잖아”라며 울상이었다. 가라앉은 분위기는 이상민의 농담에 웃음바다가 됐다. “나는 미국에서 랭귀지코스부터 할 생각인데, 앞으로 지도자보다는 통역을 할까봐.”

# 이제 오빠가 아닌 아빠

이들은 자녀 교육 이야기가 나오자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상민은 딸 현조(9)가 플루트를 시작했고, 문경은은 딸 진원(11)이 미술을 하고 있다. 문경은이 “물감 값이 5만~6만원이라니, 돈이 장난 아니게 들어가”라고 운을 떼자 이상민은 “형, 악기 가격은 2000만원이래. 기절하는 줄 알았어”라고 열을 올렸다. 우지원은 아침마다 두 딸을 깨우느라 선수 시절보다 더 일찍 일어난다고 했다.

소녀 팬을 몰고 다니던 ‘오빠’들은 이제 가장으로서 어깨가 무거운 ‘아빠’가 됐다. 앞으로 프로농구에서도 ‘아빠’처럼 후배들을 보듬고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위치에 섰다. 그리고 그 몫을 차근차근 시작해 가고 있다.

이상민이 우지원의 은퇴 소식을 듣고 한 이야기는 “전력분석관보다 구단 직원으로 들어가서 행정을 배우는 게 낫지 않았을까. 프런트 출신 감독들이 지도자로서 능력도 더 인정 받잖아”라는 것이었다. 우지원은 “스타 출신이면서 행정력, 지도력을 겸비한 인재가 나와서 판을 키워야 돼. ‘농구의 홍명보’가 필요하다는 거지. 상민이 형이 적격 아냐?”라고 받아쳤다. “우리 중에 꼭 그런 사람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게 제2의 농구 인생을 시작한 세 사람의 꿈이다.

글=이은경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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