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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Leisure] 쿵 짝 짝 쿵 짝 짝…스텝 밟으면 행복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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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왈츠는 한 쌍이 돌면서 다른 쌍과 어울려 커다란 원을 만든다. 지구의 자전·공전과 같은 원리다.

지난 8월 부산 파라다이스 호텔 판촉팀. 곽정희 계장이 난감한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158㎝ 키로는 무리였다. 10㎝가 넘는 하이힐도 별 소용이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거절하는 건 더 힘들었다. 연방 방긋대는 저 얼굴에 대고 어찌 '안 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스물아홉살 아가씨가 다시 침묵을 깼다.

"제가예, 정~말로 하고 싶거든예. 그리고 진~짜로 잘 할 수 있어예. 어떻게 안 될까예?"

2주쯤 뒤 이현숙씨는 부산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11월 27일 열리는 비엔나 오페라 볼의 데뷔던트 무대 참가 자격을 따냈다. 지원자는 여성 12명 모집에 40여명. 나이 제한을 가까스로 통과한 데다 키는 160㎝ 이상이란 기준에 못 미쳤고 춤이라곤 재즈 댄스 3개월 경력이 전부인 그가 붙었다. 오스트리아 대사 앞에서 비엔나 왈츠 데뷔 무대를 갖게 된 것이다. 행사 담당인 곽 계장이 한참 뒤에 사정을 일러줬다.

"어울리는 키(172㎝)의 남자 지원자가 막판에 나타났거든요."

부산=손민호 기자<ploveson@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 혼자가 아니다

교습은 9월 초 시작됐다. 안무를 맡은 알렉스 김은 첫날부터 파트너 손을 잡으라고 했다. 어색한 분위기. 생면부지의 남자와 손을 맞잡고 바짝 붙어야 한다. 현숙씨는 굽이 제일 높은 댄스 슈즈를 신었다. 파트너(김인오.27)도 큰 편은 아니지만 반듯하게 자세 잡기조차 어려웠다.

현숙씨는 은근히 속이 상했다. 다른 동료들이 너무 잘했다. 2년간 라틴 댄스를 배운 친구(이경진.29), 발레를 전공하는 학생(김지혜.22), 무용 강사(마명희.24)의 스텝은 자연스러웠고, 손끝은 우아했다. 하지만 현숙씨는 계속 파트너의 발을 밟았고, 짧은 다리는 영 어색하게 움직였다.

그래서 방에서나, 거실에서나 늘 연습이었다. 한 살 터울 오빠는 볼 때마다 놀려댔고, 가족회의 끝에 간신히 설득한 부모님도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그래도 연습은 멈추지 않았다. 길을 걷다가도 스텝을 밟았고, 거울만 보면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나중에야 알았다. 다른 동료들도 각자 맹연습 중이란 사실을. 그들도 자신 때문에 파트너가 흐트러질까, 무도회를 망치는 건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세 번씩 대구에서 세 시간을 달려오는 남매(권현재.권현정)도, 이제는 나이트 클럽에서도 왈츠를 춘다는 대학생(황성원.25)도, 교감선생님 몰래 교습에 나온다는 초등학교 교사(조현아.25)도 현숙씨랑 다르지 않았다. 거울만 보면 팔을 올렸고, 땅에 두 발만 디디면 전진과 후진을 반복했다. 갑자기 친구가 늘어난 느낌이었다. 24명은 똑같았다. 그들에게 왈츠는 시련이었고, 목표였다.

***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사실 그리 대단한 게 아닐 수도 있다. 무도회가 성공적으로 끝난다고 해서 무슨 상을 받는 건 아니다. 비엔나 오페라 볼이란 게 오스트리아에서나 최고 영예의 무도회라지만 한국에선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 유럽에서나 데뷔던트 무대를 통해 상류사회에 진출한다지만, 한국에서 왈츠는 써먹을 데도 마땅찮다. 그런데도 현숙씨는 마냥 좋았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외려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봐도 개의치 않았다. 직장에서 집, 다시 집에서 직장을 반복하던 따분한 일상은 더 이상 없었다. 생활은 늘 활기찼다. 스텝을 밟을 때마다 성취감이 들었고, 무도회가 다가올수록 자신감이 붙었다.

파트너 인오씨가 가장 고마웠다. 왈츠는 파트너와의 조화가 가장 중요하다.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둘이 하나처럼 움직이는 게 왈츠다. 왈츠가 아니라면, 혼자 추는 춤이라면 배우지 못했을 경험이다.

기껏해야 석 달 동안 춤 하나 익혔을 뿐이다. 내일 무도회에서 5분30초 동안 무대에 서면 그것으로 끝이다. 어렵게 외웠던 스텝도 이내 잊을 것이다. 친구들도 각자의 일상으로 되돌아갈 테고. 무도회가 끝나면 아마 친구들을 껴안고 울지 모른다.

현숙씨는 문득 어릴 적 꿈을 떠올렸다. 그때 그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내일 그는 '다른 사람'이 된다. 왈츠를 배우며 꿈꿔왔던 사람, 석달 전 일상에선 알지 못했던 그 사람 말이다.

*** Tip
댄스 스포츠(또는 스포츠 댄스)는 경기 종목상 명칭이다. 전 세계 규칙이 동일하다. 볼룸(Ballroom) 댄스란 말도 있다. 볼룸은 무도회장이란 뜻. 즉 무도회에서 추는 춤이다. 댄스 스포츠와 볼룸 댄스의 기원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춤이다. 모던 댄스는 스탠더드 댄스라고도 한다. 남녀가 정해진 틀에 따라 추는 춤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라틴 댄스는 즉흥성이 인정된다.

**** 댄스 스포츠 100만명 시대

일본 영화 '쉘 위 댄스(Shall we dance)'의 스토리. 메마른 일상에 허덕이던 한 중년 가장이 퇴근길에 우연히 댄스교습소 간판을 본다. 그리고 한참을 주저하다, 몇 번을 되돌아서다, 마침내 교습소 문을 연다. 그 뒤로 인생은 일사천리로 바뀐다. 최근 개봉된 미국판도 주인공만 성공한 변호사로 바뀌었을 뿐 마찬가지다. 영화에서나 일어나는 일일까.

댄스 스포츠 강사 장두성(32)씨의 설명은 다르다. "회원 200여명 가운데 단 한 명도 결심하자마자 찾아온 적이 없다. 모두가 몇 번을 망설이다 문을 두드린다. 심지어 6개월 걸린 회원도 있다."

도대체 춤이 뭐기에 이럴까. 왜 우리는 늘 춤을 꿈꾸기만 할까. 장바구니 들고 카바레 들락거리다 단속에 걸린 아줌마들을 TV 뉴스에서 본 기억이 너무 선명하기 때문일까. 기록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18세기 유럽에선 '왈츠 고아'란 말이 있었다. 유부녀들이 아이도 잊은 채 왈츠에 빠져 살았기 때문이란다. 춤을 꺼리는 풍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관습 같은 것이었다. 만약에 아니라면, 춤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렬한 유혹이다. 수세기 동안 공동체 전체가 틀어막아 왔을 정도로.

프랑스혁명에서 올림픽까지=유럽의 춤 전통은 단연 왈츠다. 왈츠가 정착된 건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가 활약한 18세기였지만 삼박자 춤은 15세기에도 있었다. 왈츠는 귀족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프랑스혁명 뒤 흥에 겨운 파리 시민이 췄던 춤이 왈츠였다. 19세기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은 범유럽의 국민가요였다.

현대의 왈츠는 댄스 스포츠 10개 종목 가운데 두 종목을 차지한다. 댄스 스포츠는 모던 댄스(비엔나 왈츠.슬로 왈츠.탱고.폭스 트로트.퀵 스텝) 5종목과 라틴 댄스(룸바.차차차.삼바.파소 도블.자이브) 5종목으로 나뉜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시범 종목이었고, 베이징 올림픽에선 정식 종목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크다.

부루스 & 지루박=카바레에서 남녀가 부둥켜안고 흐느적거리면 '부루스'고, 남자가 여자를 빙빙 돌리면 '지루박'이다. 둘 다 현대 댄스 스포츠 종목에 없는, 다시 말해 한국에만, 엄밀히 따져 한국 카바레에만 있는 춤이다.

모던 댄스가 처음 들어온 건 일제시대였다. 일본인과 일본 유학생을 통해서다. 조선조 마지막 왕세자비 이방자 여사도 왈츠를 췄다는 기록이 있다. 미군 주둔과 함께 블루스(Blues)와 지터벅(Jitter Bug)도 수입됐다. 미군이 춤을 췄던 곳이 군부대 앞 클럽. 그때부터 춤은 음지의 길로 접어들었다. 박정희 군사정부가 퇴폐문화 근절을 선언한 뒤로는 음지문화를 대표했다. 이때 블루스가 '부루스'로, 지터벅이 '지루박'이 됐다. 이름만 바뀐 게 아니라 춤도 퇴폐적으로 변했다. 최고 격식의 예복인 연미복은 제비족의 어원이 됐다.

100만명이 즐긴다=현재 국내 댄스 스포츠 인구는 100만명을 넘는다. '땐.땐.땐…'으로 시작되던 신문 광고를 보고 '부루스' 한번 당겨본 인구가 아니다. 합법적인 교습기관이 배출한 숫자다. 지금은 중.고교에서도 댄스 스포츠를 가르친다. 댄스 스포츠 경기연맹은 현재 대한체육회 소속이다.

지금 춤을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는 곳이 백화점 문화센터다. 3개월(일주일에 교습 1회)에 10만원만 내면 된다. 열 종목을 모두 배우려면 1년쯤 걸린다. 각 구청이나 동사무소, 대학, 언론사 문화센터도 강좌를 연다. 개인교습이 필요하면 학원을 찾는 게 좋다. ISTD나 IDTA에서 발급한 자격증이 있으면 믿을 만하다. 국제 댄스 스포츠 강사 연합회 같은 곳이다.

▶도움말=부산 댄스스포츠 경기연맹 알렉스 김 회장, 이준희 아카데미 장두성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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