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부즈맨 칼럼] 이슈 중심을 다룬 문화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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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중학교 1학년생인 아들은 신문에서 주로 스포츠와 영화 기사만을 찾아 본다. 뉴욕 테러사건 이래 국제면도 읽는다고는 하지만, 그 나머지 대부분에는 아이가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걱정스러운 일이나 그저 나무랄 수만도 없는 것은 나 역시 신문을 '편식'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나는 1면부터 큰 제목을 대강 훑어보고 웬만하면 사람들의 얼굴 사진이나 무심코 들여다보다가 정치면은 그냥 넘겨버린다. '김상택 만화세상'과 '시가 있는 아침'에 잠시 머물고 문화면의 예술.학술기사와 기획기사들을 찾아 읽지만, 스포츠는 건성으로 넘어가고 내가 잘 모르는 경제면에는 거의 눈길을 주지 않는다. 내게는 문화면이,아들에게는 스포츠면이 신문을 보는 이유인 셈이다.

신문의 지금과 같은 지면 배분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 때때로 근본적인 의문을 갖곤 한다. 정치는 어째서 항상 1~5면을 차지해야 하고 스포츠는 매일같이 독립된 섹션에 사진으로 도배가 돼야 하는가. 그리고 문화는 늘 구석진 모서리에 끼여 있어야 하는가.그것은 사회적 약속인가, 아니면 독자여론조사의 결과인가.

정치나 스포츠가 문화에 비해 우리의 삶에 더 직접적인 영향력을 갖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겠지만, 그것이 낡은 고정관념은 아닌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정치면의 시시콜콜한 소문과 뒷얘기들을 빼버리고 스포츠면의 대문짝만한 사진들을 좀 줄이면 문화 관련 지면을 늘리는 것이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한 사건을 머리기사로 하느냐, 단신으로 하느냐, 아예 기사에서 빼버리느냐 하는 판단의 척도는 결국 그 사건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의미의 크기와 새로움일 것이다. 중요한 사건은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고 새로운 담론을 형성한다. 이런 판단의 기준을 의미가 아니라 대중적 흥미에 두는 언론을 우리는 황색언론이라 부른다.

이를테면 탤런트 황수정 구속사건을 14일자 1면에 사진과 함께 올린 판단에는 이 '황색성'이 들어 있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정치가 우리 사회에서 정말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고 있는지 지극히 의심스러운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계속 앞부분의 지면에 싣고 있는 우리 신문들 전체가 사실은 '황색성'에 기대어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본다. 정치기사는 사실 스포츠처럼 재미가 있다. 지금 스포츠기사만 좋아하는 내 아이도 나이를 먹으면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에 비하면 문화계, 그 중에서도 특히 대중문화를 제외한 예술과 학술분야에서 이런 재미를 찾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를 다루는 지면도 작다.

매일 48면, 56면씩 발행하는 신문에서 이들 분야에 할애되는 지면은 평일 2~3페이지 정도,그리고 수요일과 토요일에 한번씩 예술과 출판섹션이 있을 뿐이다. 주말의 '행복한 책읽기'는 우리에게 아직 책이 있음을 일깨워주고,7면 모퉁이의 '시가 있는 아침'은 아직도 시가 씌어지고 있음을 가까스로 알게 해준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주의 문화면 기사들에 격려를 보낸다. 12일자에는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문화정책의 방향을 다루었고(16면), 14일엔 국회에서 논의 중인 출판법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15면).

굵직한 학술서평과 '철학에세이'가 눈을 끌었고(15일자 17면), 실크로드 연구서를 펴낸 정수일 전 교수와의 e-메일 인터뷰가 있었다(16일자 12면). 문화면을 단신이나 가십으로 채우는 대신 큼직하고 진지한 이슈 중심으로 다룬 것에 공감한다.

지난주에도 많은 사건이 일어났고 그만큼의 사건들이 새로운 사건에 밀려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우리에게는 이 정보의 탁류 속에서 잠시 비켜서서 자신을 돌아볼 여백을 누릴 권리가 있다. 문화면에 나는 그런 역할을 기대하며, 그 공간이 점점 더 넓어지기를 바란다.

安奎哲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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