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 전도연, 뭐든 그려 넣을 수 있는 백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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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1면

‘천의 얼굴’이라는 표현은 좀 진부하긴 해도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녀를 따라다닐 수식어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실례인 줄 알면서도 ‘연기여왕’을 만나자마자 연기 잘하는 비결부터 물었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는 스스로를 “감독 의존적 배우”라고 설명했다. “감독이 생각하고 원하는 걸 최대한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면 거기에 만족한다.” 꼭 겸양의 말만은 아니지 싶다. 어쩌면 ‘천의 얼굴’의 비밀은 여기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미 선과 색이 가득한 도화지에 그림이 제대로 그려질 리 만무하듯이, 자신의 지론으로 머릿속이 복잡한 배우가 팔색조 연기를 펼칠 수는 없을 테니까. ‘하녀’의 은이는 하얀 종이와도 같은 전도연의 강점이 최대한으로 쓰여진 인물이다.

글=기선민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저 이 짓 잘해요.” 하녀 짓, 그러니까 허드렛일을 잘한다는 약간 굴욕적인 듯한 대사를 전도연만큼 해맑은 표정으로 소화해낼 배우가 어디 있을까. 줄거리만 봐서는 꼭 TV 막장 드라마 같은 ‘하녀’가, 햇빛에 반짝거리는 물고기 비늘처럼 오묘한 색깔을 띤 웰메이드 치정극이 된 건, 그녀에게 감사할 일이다. 김기영 감독 원작의 하녀(이은심)가 중산층 가정을 한순간에 보내버리는 팜므 파탈(요부)로 자신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발산했다면, 전도연의 하녀 은이는 백지와 같다. 말갛고 뽀얀 피부의 아이의 눈망울을 보는 느낌이랄까. 욕망에 눈뜨기가 무섭게 꺾여버리고 마는, 이 시대에 갖지 못한 자의 슬픈 초상 같기도 하다.

역시, 전도연이었다. 사방에서 “혼신의 힘을 쏟아부었다”는 평가가 들려온다. 은이의 대사 중 ‘이 짓’을 ‘연기’로 바꾼다면 곧바로 그녀 자신의 얘기가 되지 싶을 만큼. 서울 삼청동에서 칸 출국을 앞두고 있는 전도연을 만났다. 영화제 출품에 맞추기 위해 두 달간 강행군한 탓일까, 볼이 쏙 들어간 모습이었다.

-출연작 중 가장 주위의 기대가 높았던 것 같아요.

“맞아요. 전 여주인공 영화가 워낙 없어서 너무 반가운 마음에 심플하게 선택했는데, 주변 사람들은 저보다 많은 걸 보더라고요.”

-시나리오를 읽은 첫 인상은 어땠나요.

“별로였어요.(웃음) 너무 전형적이랄까, 뻔하다고 할까. 그래서 안 하겠다고 했죠.”

-그런데?

“임상수 감독님을 만나서 설득에 넘어갔어요.”

-특히 마음에 안 들었던 점은요?

“은이라는 인물이 이해가 안 갔어요. 고등교육도 받고 돈이 궁하지도 않은데 왜 그런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됐는지. 그래도 감독님과 평소에 꼭 한번 작품 같이 해보고 싶은 마음에 믿고 가보기로 한 거죠.”

-그래서 촬영장에서 감독 숙소를 찾아가 크리넥스 한 통 다 쓸 정도로 운 건가요.

“캐릭터를 이해하지 못 하는 내 스스로에게 답답했던 것 같아요. 저는 감정적으로 완벽하게 이해해야 연기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감독님은 감정이 꼭 넘치지 않더라도 이런 각도의 이런 모습을 담는, 비주얼 강한 영화를 만들려고 한 것 같아요. 감독은 배우인 내게 절대적 존잰데, 내가 감독의 생각을 이해 못 하니 힘들 수밖에 없죠. 그러니 크리넥스 한 통을 다 쓸 만큼 울었죠.”

-결국 은이를 이해하지 못했단 얘긴가요?

“이해했다기보다 받아들였다고 봐야죠. 은이를 제외한 훈(이정재)이나 해라(서우), 병식(윤여정)은 어느 정도 전형성이 있는 캐릭터예요. 하지만 은이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장면마다 달라 보이는 인물이었어요. 그게 혼란스러웠죠. 은이는 순수해서 자신의 욕망과 본능에 그때그때 충실한 인물이죠. 천애고아처럼 자라 해라의 빤스를 빠는 허드렛일을 하지만 세상을 한 번도 원망해본 적 없는. 그러니 ‘저 이 짓 잘해요’라고 스스럼없이 말하겠죠. 그러던 여자가 난생 처음 뭔가에 욕심이 생기고 갖고 싶어졌는데 세상은 너무나 불친절하게 나왔으니, 극단적인 시도를 할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요. 그런 모습이 나, 전도연 안에 있을 수도 있는데 내가 너무 어렵게 찾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촬영 일정이 굉장히 빠듯했다면서요.

“칸 출품 때문이죠. 일주일 동안 밤샘도 했어요. 순서대로 찍지 않았어요. 장면 장면 찍어 짜깁기한 느낌? 이런 촬영은 처음이었다니깐요.(웃음) 찍을 땐 솔직히 인물의 감정이 안 느껴지는 영화가 될 거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완성본을 보니 아니던데요. 보고 나니 은이가 너무 불쌍했어요. 감독님이 ‘은이는 한국 영화 사상 전무후무한 캐릭터가 될 거다’라고 한 말이 떠올랐죠.”

-칸 여우주연상에 대해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 진짜 너무너무 담담한데 자꾸 주위에서 부담 줘요.(웃음)”

-어떻게 담담할 수 있죠?

“한 번 받았으니까!(웃음) 안 받았으면 혹시나 하겠죠.”

-‘칸의 여왕’ 되고 나서 뭐가 제일 달라졌나요.

“훈장 받은 거요.(콧등 찡그리며 웃음) 사실 전 상 받았으니 작품 선택 폭이 굉장히 넓어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관계자들에 따르면 ‘하녀’ 촬영에서도 전도연의 프로다움은 두드러졌다고 한다. 촬영뿐 아니라 홍보나 마케팅과 관련해 주문사항이 아무리 많아도 결국 다 해내는 걸 보고 다들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해야 할 게 정말 많았어요. 그런데 감독님도 그렇고 모두들 ‘전도연은 할 수 있어’ 이런 분위기인 거예요. 게다가 현장에서 이미 제가 고참이 돼버린 거 있죠. 촬영감독님이 저보고 ‘선배님’ 그럴 지경이니. 뒤돌아서 끙끙 앓을지언정 앞에서는 다 해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와이어 촬영한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고생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몸으로 하는 장면은 생각할 때만 어렵지, 실제 하면 괜찮아요. 정작 어려운 건 은이가 병식의 뺨을 후려치는 장면이었어요. 그 착한 은이가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거잖아요.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7번, 8번쯤 찍었나?”

자, 이제 물어볼 차례다. 몸짓뿐 아니라 대사도 수위가 높았던 베드신에 대해서.

“‘하녀’를 찍으면서 그런 욕심이 들었어요. 몸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면 좋겠다는. 배우는 몸 전체로 표현하는 사람인데 내가 아직 몸 안에 갇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답답함이 있었거든요. 어떻게 내 몸이 보여지나 신경 쓰면 안 되는 건데. (목소리가 다소 높아지며) 그런데 아직까지도 ‘파격 노출’에 대해 관심 갖는 거 보면 솔직히 좀 우스워요. 파격이 뭐길래, 대체. 시각적인 파격이야 이미 나올 대로 다 나온 거 아닌가요? ‘색, 계’를 두고 파격, 파격 하지만 전 탕웨이 겨드랑이털 보인 게 너무 섹시하더라고요. 아무도, 단 한 번도, 당연하다고 생각지 않은 부분을 시도하는 것, 그게 파격 아니겠어요? 전 앞으로도 마음에 드는 작품인데 베드신이 있다고 거절하진 않을 거예요.”

글=기선민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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