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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에 지친 필리핀 ‘변화’를 원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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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10일 치러진 필리핀 대선에서 당선이 유력한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상원의원이 투표용지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아시엔다 루이시타 AP=연합뉴스]

10일 치러진 필리핀 대선에서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50) 상원의원의 승리가 확실시되고 있다. 필리핀 ABS-CBN방송이 비공식적으로 집계한 개표 결과에 따르면 오후 9시30분(현지시간) 현재 아키노 후보가 52만 표(39%)를 얻어 36만 표를 얻은 조셉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을 앞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야당인 자유당 후보로 출마한 아키노 의원은 깨끗한 이미지를 앞세워 표심을 파고들었다. 현지 언론들은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에 대한 국민적 염증과 피플 파워 혁명의 신화를 이룩했던 아키노 가문에 대한 무한 신뢰가 아키노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권력층의 친인척 부패가 만연했던 필리핀에서 부패 스캔들이 없었던 아키노의 정치 이력도 당선에 한몫했다. 이 때문에 “깨끗한 필리핀을 건설하자”는 아키노 후보의 선거 구호가 도시 중산층과 서민들에게 폭넓게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정당이 어디든 인물 위주로 투표하는 필리핀 선거의 특성이 이번 선거에서도 나타났다.

새 정부의 최대 개혁과제는 정치권과 사회에 만연한 부패 고리 차단과 경제 회복으로 꼽히고 있다. 또 역대 필리핀 대선에서 부정 선거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선거 이후 정국 안정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고질적인 선거 폭력도 잇따랐다. 로이터 통신은 이날 정치세력 간 총격 등으로 10명이 숨졌다고 전했다.

◆“투표율 80% 이상 될 듯”=이날 유권자들은 이번 선거에 처음 도입된 자동투표시스템(AVS)에 적응하지 못해 우왕좌왕했다. AVS 투표용지가 거의 1m에 달해 기표한 뒤 투표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예전보다 길어졌다. 이전엔 투표용지에 지지 후보의 이름을 썼으나 이번엔 투표용지에 적힌 수많은 후보 가운데 지지 후보의 이름을 찾아내 기표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투표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경우도 있어 재투표 시비를 부를 수도 있다고 현지 신문들은 전했다. 새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높은 기대는 투표율로 나타났다. 필리핀 선거관리위원회는 “불볕더위에도 불구하고 등록 유권자 5080만 명 중 85%가 투표에 참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깨끗한 정치’로 경제 살리기=폴 가르시아 ING 투자자문 필리핀 투자담당은 “신흥시장에 속했던 필리핀 경제가 지금은 변방으로 미끄러졌다”며 “새 정부는 경제 살리기에 매진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10일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상위권을 달렸던 필리핀 경제가 지금은 캄보디아·파키스탄·스리랑카와 비교되는 신세가 됐다”고 지적했다. 고용을 창출할 만한 산업 기반이 빈약해 침체를 벗어나기 힘든 상황이다. 관광 등 서비스업 위주로 해외 투자가 집중돼 제조업 분야는 만성적인 자금 부족에 허덕이며 주저앉았다. 2008년 아세안 집계에 따르면 필리핀이 유치한 해외 투자액은 15억 달러(약 1조7000억원)에 그쳤다. 같은 아세안 회원국인 말레이시아(73억 달러)·태국(98억 달러)·베트남(80억 달러)의 투자 유치액보다 훨씬 적다. 필리핀 경제 전문가들은 “투자 유치를 위해 도로·항만 등 인프라 건설이 선행되어야 한다”며 “법인세 등 세금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역설했다.

◆부패 고리 대대적 수술=7000여 개 섬으로 이뤄져 지역색이 강한 필리핀은 토착 정치세력의 입김이 커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새 정부가 해묵은 토착 정치세력의 부정부패 문제를 제대로 수술대에 올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군벌화된 토착 정치세력의 저항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새 정부는 아키노 후보의 어머니인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의 전매특허였던 부패와의 전쟁을 재연할 것으로 보인다. 아키노 후보는 선거 연설에서 “새 정부가 출범하면 단시간 안에 정부에 만연한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겠다”고 강조했다.

홍콩=정용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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