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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 칼럼] 연횡보다 합종이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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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세계에 평화를 이루는 두개의 질서가 있다고 했다. 그 하나는 어떤 강력한 맹주가 다른 나라들을 누르고 힘으로 평화를 보장하는 소위 '팍스 로마나' 체제이고, 다른 하나는 비슷한 힘을 가진 나라들이 어느 하나의 독주를 막고 합의를 통해 평화를 유지하는 '견제와 균형' 체제이다.

현재의 세계화 질서 아래 모든 고래와 새우들이 공평한 기회를 누리는지, 아니면 몇몇 고래의 기득권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지 그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겠다.

지난해 11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세안+3' 정상회담에서 동아시아경제협력체 창설을 제의했었다. 그리고 관련 보고서 작성을 13개 회원국 26명의 학자로 구성되는 동아시아비전그룹(EAVG)에 위임했다. 그때 나는 세계화 시대에 아시아의 이익을 지키는 자구책의 하나가 이 지역의 경제통합이라는 글을 썼었다.

*** 아시아 경제 이익 지키기

동아시아의 협력과 단결 논의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가 동아시아경제회의(EAEC) 발족을 제창했고, 일본 역시 아시아통화기금(AMF)창설을 제의했었다.

역내 국가들이 그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미국 때문에 주저했었다. EAEC는 미국을 제쳐놓는 '괘씸죄'에 걸렸고, AMF도 국제통화기금(IMF)에의 '반역 음모'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복제인간을 만들어내는 기술로도 땅덩이를 옮기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그런 재주만 있으면 총성으로 지새는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을 멀찍이 떼어놓을 수도 있고, 미국 좋아하는 어느 나라를 로스앤젤레스-당분간 뉴욕은 금물이니-앞바다쯤에 떠메다 놓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궁즉통(窮卽通)! 미국은 육지 대신 바다를 내세워-일례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를 통해서-아시아에 들어왔다. 그러나 아시아나 동아시아로 명패를 박을 때는 이런 편법마저 통하지 않는다.

정부는 5일 브루나이에서 개최되는 아세안+3 정상회의에 비전그룹이 준비한 6개 분야의 57개 권고사항을 제출할 예정이다. 그중에는 동아시아자유무역지대(EAFTA), 동아시아투자지역(EAIA), 동아시아통화기금(EAMF)설립 등 굵직하고 묵직한 제안들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EAEC가 EAFTA와 EAIA로 주민등록을 바꾸고, AMF가 EAMF로 주소를 옮겼지만 미국이 불청객이란 사정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金대통령은 마하티르와 달리 미국에 괘씸죄를 지은 적이 없고(!), 한국 또한 일본과 달리 미국에 반역 음모(?)를 꾀할 리가 없으므로 이번 비전그룹의 보고서는 미국의 반발에 부닥칠 소지가 적다는 것이다.

예컨대 EAMF는 절대로 IMF의 라이벌이 아니고, 금융 위기에 안전망 노릇이나 하는 보완장치일 뿐이라고 미리 '알아서 기는' 마당에,9.11테러 이후 여러모로 걱정이 많을 미국이 전처럼 '무조건 안돼'만으로 밀어붙이기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김칫국' 전망이 나오기 때문이다.

니버의 심심한 강의보다 한층 더 흥미진진한 현실이 있었다. 기원전 4세기 일곱 나라가 천하의 주인을 다투던 중국의 '전국시대'에 소진은 여섯 약소국들이 힘을 합쳐서 한 강대국에 맞서는(合衆弱以攻一强) 합종책을 역설했다. 반면에 장의는 약소국이 강대국을 섬기며 그의 도움으로 이웃 나라를 치는(事一强以攻衆弱) 연횡책을 설파했다.

모두가 난세를 살아가는 약자의 계책이지만, 합종의 약점은 새우 진영 내부의 이해 충돌로 동맹이 깨지기 쉽다는 것이고, 연횡의 약점은 고래한테 도움받는 대가로 그의 요구를 계속 들어주다가 마침내 속국이 된다는 데에 있다. 아무래도 내 귀에는 연횡보다 합종이 솔깃하게 들린다.

*** 지역 경제블록 구축해야

다시 한번 나는 동아시아의 협력과 단결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미국에 적대적일 이유가 없다. 동북아 경제의 재도약 방안을 묻는 질문에 최근 미국의 제프리 삭스 교수는 "아시아가 통합된 경제체제를 갖추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 경제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체제를 구축했으면 한다"라고 대답했다. 한.중.일 3국의 교역이 더욱 확대되어 아시아의 '지역경제 블록'으로 발전하라는 그의 조언은 현대판 합종책이다. 미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지역경제 블록을 만들라니!

"나 지금 떨고 있니?"

"떨 것 없다니까."

정운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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