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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고 숨기고 도박하고 … 투자은행이 기본을 버렸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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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호 28면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 대출) 부실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저금리에 기초한 과잉 유동성과 이에 따른 자산 버블 현상이 주된 배경이었다. 수익을 위해서라면 상식마저 저버리는 월가의 지나친 탐욕과 함께 고도로 발달된 금융기법을 규제와 감독 시스템이 미처 따라가지 못한 제도상의 허점 또한 사태를 심화시킨 요인으로 거론된다.

실패에서 배우는 경영⑤ 리먼 브러더스의 몰락

위기를 수면으로 떠올린 것은 2008년 9월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보호신청이었다. 리먼은 당시 세계 4위의 투자은행으로 시가총액이 300억 달러를 넘나들던 거인이었다. 글로벌 금융기관으로의 도약을 꿈꾸던 많은 국내 은행이 배우고자 했던 역할모델이기도 했다. 이러한 리먼의 파산보호신청은 국제 금융시장에 엄청난 충격파를 안겼다.

리먼의 파산에는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차입을 통해 과도한 위험에 투자하는 비즈니스모델의 근본적 한계에서부터 감독기관의 규제 실패 등이 우선적으로 도마에 오른다. 아울러 어려운 재무상황이 주주 및 채권자들에게 미칠 영향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경영진의 잘못된 의사결정과 대차대조표 조정(manipulation) 등의 잘못된 관행도 지적되고 있다.

리먼을 비롯한 투자은행들의 비즈니스모델은 대개 차입을 통해 조달한 자금을 위험이 큰 상품에 투자하는 형태였다. 고수익을 목표로 리스크를 감수하는 이러한 사업방식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시장의 신뢰가 절대적이다. 문제는 이러한 차입의 구조와 규모가 정상을 벗어난 데 있다.

위기 직전까지 리먼은 7000억 달러 규모의 자산을 운용하고 있었지만 자기자본은 250억 달러에 불과했다. 또한 투자자산이 장기로 운용되는 데 반해 자금조달은 환매조건부증권매매시장(Repo)의 단기 거래에 의존했다. 매일 수백억에서 수천억 달러에 이르는 자금을 Repo를 통해 끌어와야 하는 상황에서, 거래 상대방으로부터 신뢰를 잃어 기존 대출금의 만기연장이 거절되거나 신규 대출이 중단된다면 자금조달 창구가 막혀버리는 난점이 존재했다.

지나친 성장우선주의도 화가 됐다. 리먼은 2006년 성장우선 전략을 채택한 뒤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대한 위험이 증가하고 있을 시점에 더욱 공격적인 투자에 나섰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경제 전반으로 확산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영토 확장에 나선 것은 중대한 오판이었다.

리먼은 경쟁자들이 리스크 회피를 위해 움츠릴 때가 시장 장악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투자처 발굴과 유동화를 통한 매매 업무보다는 고위험ㆍ고수익 자산에 대한 직접투자 방식으로 사업 방향을 변경했다. 이 과정에서 제값에 팔리지 못한 금융자산을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상업용 부동산 및 구조화된 대출자산에 대한 투자가 크게 늘었다.

브레이크 없는 투자에 대한 경고등이 도처에서 울리고 있었지만 이를 제어하는 안전장치는 작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회사 최고경영진은 내부적으로 설정한 위험관리 규정이나 투자 한도에서 벗어난 투자를 용인하는 등 사실상 일탈을 방조했다. 투자 한도는 계속 높아져 간 반면 위험관리 시스템의 기능은 날로 약화돼갔다.

2008년 3월 다른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의 부도가 기정사실화되자 리먼은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에 처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가시적인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대외적으로 약점을 가리고 미봉책으로 연명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사업 지속을 위해 자금 차입이 필요했던 리먼은 신용평가회사들로부터 우수한 등급을 받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를 위해 신용평가사들이 중시하는 현금유동성과 레버리지(자기자본 대비 차입 규모) 수치를 개선해야 했으나 결과는 신통치 못했다. 2008년 2분기에 리먼은 28억 달러의 분기손실을 발표했다. 1994년 상장 이후 최초의 손실이었다. 당장 시장에 미칠 충격을 줄이기 위해 레버리지 비율을 낮추는 것이 시급했다.

차입금 비중을 줄이기 위해 보유자산 매각에 나섰으나 문제가 생겼다. 당시 시장상황으로는 리먼이 공정가치로 장부에 기록한 금액보다 낮은 금액으로 자산을 처분해야 했다. 시장은 리먼의 공정가치 평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만약 보유자산 매각으로 손실이 발생할 경우 자기자본이 줄어들 뿐 아니라 유사한 자산에 대한 평가손실이 추가로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이 대목에서 리먼이 선택한 대안이 이른바 ‘Repo 105’로 불리는 회계적 기법이었다. Repo 105란 일종의 환매조건부채권 매매로, 현금 100달러를 빌리면서 채권 105달러를 담보로 제공한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일반적으로 환매조건부증권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경우, 회계상으로는 증권을 담보로 한 차입으로 처리하지만 리먼은 이를 매각으로 처리했다. 결과적으로 리먼은 이를 통해 2007년 말과 2008년 1·2분기 말에 각각 386억 달러, 490억 달러, 500억 달러의 차입금을 줄였다.

이 과정에서 매각회계처리에 필요한 변호사의 의견(True Sale)을 미국에서 얻을 수 없었던 리먼은 자사의 유럽법인으로 증권을 이관한 뒤 Repo 거래를 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Repo 105를 이용해 차입금을 줄인 사실을 규제기관과 신용평가회사, 투자자는 물론 이사회에도 공시 또는 보고하지 않았던 점이다. 매각으로 처리된 증권은 수일 내에 리먼이 다시 환매수했다.

리먼은 또한 재무제표에 계상된 현금성 자산 중 상당 부분을 현금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적절히 공시하지 않았다. 2008년 9월 10일까지도 즉시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이 400억 달러에 달한다고 발표했지만 실상 즉각 현금화할 수 있는 금액은 20억 달러에 불과했다.

리먼의 몰락에는 미국식 투자은행 시스템에 공통으로 내재한 여러 문제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나 금융위기 발생 후 정부의 대대적 지원이라는 변수가 따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금융기관이 살아남은 데 반해 유독 리먼을 포함한 일부 은행만이 붕괴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을 망각한 데 있다.

먼저 과도한 레버리지를 들 수 있다. 레버리지는 이익을 증대시키는 유용한 수단일 수 있지만 경기침체기에는 손실을 급증시키는 독이 된다. 레버리지가 10인 경우 부채로 조달해 투자한 사업에서 10%만 손실이 발생해도 자기자본이 모두 잠식되는 결과가 초래된다. 과거의 호시절처럼 주기적인 자산가격 재상승이나 즉각적인 경기 호전을 기대할 수 없는 시기에는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위기 때는 과감한 자산매각 등을 통해 레버리지를 줄이는 전략이 효과적이다.

리스크 관리 역시 기본 중의 기본이다. 사전에 정해 놓은 규정이나 투자한도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리스크 관리 부서는 경영진 혹은 타부서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운영될 수 있어야 한다. 리먼은 외견상 그럴듯한 내부견제장치와 통제장치를 갖추고 있었지만 실패한 기업이 그렇듯 운영은 허술했다.

마지막으로 올바른 정보 공유와 회계 처리를 꼽을 수 있다. 입맛에 맞는 정보만을 골라 이를 맹신하다 보면 왜곡된 정보에 기초한 그릇된 의사결정이 이뤄질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는 대개 치명적이다. 기업 내ㆍ외부에 주요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회계처리가 투명하지 못하면 이해관계자 전반의 신뢰를 잃게 된다. 이는 종국에 가서는 기업 붕괴로 이어진다. 한때 잘나가던 엔론의 몰락을 부른 결정적 원인은 회계부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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