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 대기업정책 폐지는 아직 일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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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주 중앙일보는 공정위에 깊은 관심을 갖고 5회에 걸쳐 여러 가지 비판과 질책을 했다. 독립성을 강화하고, 산업정책을 지원하기보다 경쟁을 촉진하는 데 치중하라고 주문했다.

또 공정위가 처리한 몇몇 사건의 적절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공정위로서는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으나 다른 시각도 있는 것 같다. 앞으로 더 신중히 처리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다.

그러나 공정위의 정책방향과 관련해 이견이나 오해가 있는 몇 가지 지적에 대해 입장을 밝히고자 한다.

먼저 시대가 변했고 기업 지배구조와 투명성이 많이 개선됐으므로 출자총액제한 등 대기업집단 정책은 이제 필요없으며, 폐지 또는 대폭 완화돼야 한다는 전문가의 주장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대기업집단 정책은 재벌 체제가 안고 있는 시스템의 위험을 방지하고, 지배주주가 적은 지분으로 전체 계열사에 경영 전권을 행사해 소수주주 등 타인 자본의 이익을 해치는 지배구조의 왜곡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국민의 정부 들어 강력한 개혁 작업과 대내외 여건 변화로 기업관행이 많이 달라졌다. 공정위도 재점검과 개선이 필요한 정책에 대해선 이를 보완하기 위한 연구.검토 작업을 진행 중이다.

그러나 대기업정책이 크게 달라져야 한다는 논거로서 기업 지배구조와 투명성이 개선됐다는 재계의 주장은 수긍하기 어렵다.세계적 투자은행인 크레디리요네의 조사 결과 신흥시장 25개국 중 한국의 기업 지배구조가 16위라는 보도가 있었다.

공정위의 과도한 조사가 기업 부담을 초래한다는 주장도 수긍하기 어렵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기업개혁 작업의 일환으로 공정위가 부당 내부거래 조사를 강력하게 추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3년간 조사 결과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고 보기 때문에 올해엔 조사 빈도와 방식을 달리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현장조사 과정에서 공정위 직원들이 월권행위를 한다는 비판은 과장됐거나 기업의 오해에서 비롯됐다. 당사자의 동의 아래 서류 등을 영치하는 행위를 영장없이 압수.수색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한 예다.

아울러 공정위의 업무성격상 기업의 지원보다 조사와 감시가 많은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기업 입장에서는 껄끄러운 측면이나 국가경제의 기본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선 누군가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

공정거래법 운영이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는 데 치중한다는 부분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사업자간 거래관계에 불공정한 측면이 있다해도 1대1의 거래관계는 경쟁 제한성이 없는 한 공정거래법으로 규율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의 힘센 사업자와 다수의 약한 사업자 사이에 정형적.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불공정행위는 정부가 개입하지 않으면 해결 방법이 없다.

대형 유통업체에 입점한 중소업체나 하도급 사업자 같은 영세업체는 일단 거래관계가 개시된 뒤에는 부당한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보복이 두려워 신고를 못하고 민사구제 절차에 의지하지도 못한다. 정부가 개입하지 않으면 구제방법이 없다.

공정위의 조사권한이 너무 세다든지,기업의 광고 및 상품가격까지 규제한다거나 소비자에게 이익이 되는 기업활동도 금지하고 있다는 등의 비판에도 반박할 수 있으나 지면상 생략한다. 다만 공정위의 증거수집 권한이 미약하므로 법원에 직접 서류조사 영장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공정위의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권고가 있었음을 밝혀둔다.

조학국 <공정거래위원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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