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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의 세상읽기] “6자회담 왜 하는 겁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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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최근 사석에서 만난 정부 고위 당국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솔직히 그렇게 보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표정이 곤혹스러워 보였다.

“그렇다면 6자회담은 왜 하는 겁니까?”

“….”

‘6자회담 무용론(無用論)’이 어제오늘 얘기는 아니다. 회담 중에도 북한 핵공장은 쉬지 않았고, 끝내 북한은 비공인 핵보유국이 됐다. 북한 체제에 중대한 변화가 오기 전에는 북핵 문제의 해결이 난망(難望)하다는 것은 갑남을녀(甲男乙女)도 다 안다. 북한 입장에서 6자회담은 루어 낚시용 미끼일 뿐이다. 지난달 21일 북한 외무성이 발표한 ‘조선반도와 핵’이라는 비망록이 그 방증이다.

비망록은 한반도 비핵화는 세계 비핵화의 일환임을 우선 분명히 했다. 이어 핵보유 목적을 “조선반도와 세계의 비핵화가 실현될 때까지 나라와 민족에 대한 침략과 공격을 억제·격퇴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또 “필요 이상으로 핵무기를 과잉 생산하지는 않을 것이며, 다른 핵보유국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세계적 핵군축 노력에 참가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6자회담이 재개되든 말든 우리는 조선반도와 세계의 비핵화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선언으로 비망록은 끝난다.

한마디로 북한 핵은 세계적 핵군축 차원에서 논의될 문제지, 6자회담으로 해결할 사안이 아니란 것이다. 북한은 미국과 동등한 핵보유국이기 때문에 세계 비핵화와 맞물려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국제사회의 현실정치를 무시한 ‘과대망상’이 틀림없지만 나름의 논리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북핵을) 관리하는 측면도 있고….”

천안함 침몰 사건 전만 해도 한·미 양국은 북한에 6자회담 복귀를 촉구해 왔다. 그 목적이 사실은 북핵 문제의 해결보다 관리에 방점이 찍혀 있음을 정부 당국자가 은연중 실토한 셈이다. 적어도 6자회담이 굴러가는 동안은 북한이 함부로 핵을 외부로 유출하진 못할 것 아니냐는 기대다.

[일러스트=강일구]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 안에서 핵개발에 성공한 유일한 나라다. 비밀리에 핵개발 준비를 완료한 상태에서 미국의 핵위협을 핑계로 NPT에서 탈퇴하고, 두 차례나 핵실험을 했다.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로버트 라이트는 “국제법적으로 북한은 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과 동등한 지위를 확보했다”고 지적한다(IHT 4월 29일자). NPT에 아예 가입하지 않은 채 핵을 개발한 세 나라와 결과적으로 같은 지위, 다시 말해 ‘NPT 체제 밖 핵보유국’ 반열에 올랐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투표로 정권이 선출되는 인도 등 세 나라는 법치국가인 반면 북한은 현대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1인 세습독재로, 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못 할 게 없다고 믿는 불량국가이자 탈법(脫法)국가라는 것이다. 따라서 핵에 대한 책임성과 신뢰성에서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 스스로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없기 때문에 6자회담을 통해 북핵을 관리하면서 ‘정권 교체(regime change)’를 기다려 보자는 것이 미국의 속내일 것이다. ‘포스트 김정일’ 시대를 내다본 시간벌기 작전이다.

북핵은 NPT 체제에 생긴 암(癌)이다. 북핵이 전이(轉移)가 심각히 우려되는 중기 암이라면 이란 핵은 초기 암이다. 이란 핵까지 못 막으면 NPT 체제는 종이호랑이가 될 수밖에 없다. 또 중동의 맹주(盟主)로서, 이슬람 신정(神政)국가인 이란의 핵무장은 미국의 중동과 세계 전략을 뿌리째 흔들어 놓을 것이다. 189개 NPT 회원국이 참가한 가운데 어제 뉴욕에서 개막된 제8차 NPT 평가회의에서 미국은 ‘이란의 북한화’를 막는 데 최대 역점을 둘 수밖에 없다. NPT 탈퇴를 선언하고, 핵보유국으로 커밍아웃한 북한의 전철을 밟지 못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 골몰할 것이다. 일단 NPT 체제 밖으로 달아나버리면 아무리 성토하고 규탄해본들 지붕에 올라간 닭 보고 짖는 격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북한의 핵공장은 계속 돌아가고 있다. 남북관계가 꽉 막힌 상황에서 북핵 문제가 장기화할수록 올라가는 것은 중국의 몸값이다. 북한의 생명줄은 점점 더 중국 손아귀 속으로 들어가고, 그럴수록 남한은 중국이 가진 대북(對北) 지렛대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사흘 간격으로 남북 정상이 중국을 찾은 것은 상징적이다. 핵과 체제 안전을 동일시하는 김 위원장의 망상(妄想) 탓에 남북한 모두 중국 좋은 일만 시켜주고 있다. 완전히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버는 꼴이다.

북한 체제의 현상유지가 국익에 부합한다는 근시안적 사고를 중국 지도부가 바꾸지 않는 한 사실 달라질 것은 없다. 중국은 백성을 굶기고, 탄압하는 시대착오적 세습왕조 정권의 샤프론 노릇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몸집이 커졌으면 머리도 따라 커져야 하는 것 아닌가. 이번 NPT 평가회의에서는 미국·러시아·중국·영국·프랑스 등 핵무기 원보유국의 비확산 책임을 대폭 강화하는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원보유국의 이해 때문에 뻔히 보면서도 핵확산을 못 막는다면 그게 무슨 비확산 체제인가. 원보유국은 막중한 책임을 통감하고, 소리(小利)보다 대의(大義)를 생각해야 한다.

글=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일러스트=강일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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