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유요? 내가 있어야만 하는 애들이 있어서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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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호 22면

손지영(오른쪽)씨가 지난달 29일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아들 다운이와 자전거를 타고 있다. 다운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자전거 여행을 할 생각이다. 신인섭 기자

누구의 엄마 손지영이 아니라 인간 손지영이 궁금해졌다. 손씨는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 채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손씨가 가난한 집 딸이라는 걸 몰랐다. “엄마가 남부순환도로 보도 블록을 까는 막노동을 했어요. 그렇게 힘들게 번 돈으로 저한테 제일 좋은 브랜드 청바지와 신발을 사 입히고 신겨 주셨죠.” 대학 졸업 후 직장 생활이 싫어 결혼을 선택할 만큼 철부지였다.

대한민국 엄마의 24시 18세 자폐 아들 다운이 홀로 키우는 손지영씨

번듯한 직장을 다니던 6세 연상의 남편 덕에 공과금을 어떻게 내는지도 모른 채 살았다. 책 읽고 음악 듣는 게 취미였다. 편안하고 행복한 생활이었다. 그런 손씨에게 첫 번째 닥친 시련. 딸과 연년생으로 낳은 아들의 장애였다. 처음엔 그저 미숙아로 태어나 모든 게 늦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땐 자폐가 뭔지도 몰랐어요. 치료받으면 고칠 수 있는 병인 줄로만 알았죠. 도서관에 가서 관련 서적을 읽어 보고야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정말 무식했어요.” 다운이가 3세 되던 해였다.

남편은 큰 힘이 돼 줬다. 딸의 육아를 전적으로 남편이 맡고, 손씨는 아들을 보살피기로 한 것이다. 노력하면 좋아질 수 있다는 의사의 한마디만 믿고 재활 프로그램에 매달렸다. 돈이 얼마가 들건 상관없었다. 비싼 곳이 아이에게 좋은 곳이라 믿었고, 아무리 먼 거리라도 한걸음에 달려갔다. 돈을 많이 쓰면 쓸수록 아이에게 좋은 엄마가 된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그만 몹쓸 소리를 듣고 말았다. ‘병신 자식을 낳았으면 집구석에 있을 일이지, 왜 밖에 나와 민폐를 끼치나’. 손씨는 모욕을 당하고도 아무 말도 못한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참 바보 같았죠. 지금 같으면 저도 한 소리 했을 텐데, 그땐 너무 어리고 소심했어요.”

치료 5년 차. 아들의 호전 정도가 성에 차지 않았고, 결국 미국으로 건너갔다. 치료에 좋다고 하면 무조건 아이를 맡기고 돈을 물 쓰듯 썼다. 남편의 몸과 마음이 망가져 가는 줄도 모른 채. 낯선 땅에 적응하지 못하고 2년 만에 서울로 돌아왔을 때 수중에는 150달러만 남아 있었다. 그래도 손씨는 남편을 믿었다. 두 번째 시련이 찾아왔다. 남편이 간암 말기 선고를 받은 것이다.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장애아 엄마 꼬리표도 모자라 과부란 꼬리표까지 달렸어요. 그런데 신기하죠. 그때부터 제가 달라졌습니다.”

식당 설거지부터 선거운동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다 교회 목사의 도움으로 지금의 공부방을 운영하게 됐다. 공부방에 딸린 방 한 칸이 세 식구의 집이 돼 줬다. 아들을 혼자 집에 두고 일하러 나가지 않아도 됐다. 먼저 간 남편을 원망하진 않았다. 오히려 감사했다. 소심하고 겁 많던 자신에게 어느 날 ‘나 죽으면 뭐 먹고 살래?’라며, 운전을 가르쳐 주고 아동미술을 공부하게 이끌어 준 사람이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설거지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던 손씨는 그렇게 할 줄 아는 게 많은 사람이 돼 갔다. 남편 없이 홀로 9년. 그 힘든 시간, 그를 성장시킨 사람은 또 있다. 바로 아들 다운이다. “장애가 있는 아이가 내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내 아들이어서, 내가 그 아이의 엄마여서, 어떡하든 살아야 했어요. 다운이가 내 아들이어서 너무나 좋아요.”

다운이가 많이 좋아진 것일까. 혹시 아이의 천재적인 능력을 발견이라도 한 것일까. “초등학교 1학년 때 키 97㎝, 몸무게 12㎏이었어요. 5학년 때까지 기저귀를 찼습니다. 그런데 지금 1m71㎝에 58㎏이에요. 화장실에서 물을 꼭 세 번 내리는 것에 집착하지만 혼자 화장실에 갈 줄 알고, 글자도 읽을 줄 알아요. 그 것만으로도 제겐 무척 대단한 아들입니다.”

무엇 하나를 배우는 데만 최소 3년이 걸리는 아들. 손씨는 다운이가 처음 “엄마”라고 부른 게 미용실에서였다는 사실도 기억하고 있었다. 다운이가 5학년일 때다. “처음 엄마라고 말했을 때 하늘을 보고 얘기했어요. ‘다운이 아빠. 부럽지? 당신은 아빠 소리도 못 듣고 갔는데, 난 엄마 소리 들었다’라고요.” 손씨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남편이 떠난 뒤 혼자 아들을 키우면서 가장 걱정했던 것은 자신의 ‘죽음’이었다. 천재지변이 없는 한, 언제 어느 때고 분명 자신이 먼저 세상을 뜰 텐데 혼자 남겨질 아들을 위해 준비를 해야 했다. 무엇보다 아들의 ‘사회성’을 길러 줘야 했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한걸음이라도 나오도록 도와줄 방법을 찾은 끝에 ‘일반학교’를 선택했다. 다운이는 특수학교가 아닌 비장애인과 함께 생활하는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많은 사람이 우려를 했지만 지금도 잘한 결정이라고 믿는 이유는 다운이가 많은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엄마, 짱이야”란 표현을 어디서 배우겠는가.

“엄마가 사랑을 줄 수 있을 땐 아이가 상처를 좀 받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상처받으면 엄마가 사랑으로 치료해 줄 수 있으니까.” 수영에 이어 자전거를 가르친 것도, 비장애인과 어울릴 수 있는 소통의 창구를 찾아 주고 싶어서였다. 비싼 돈을 들이지 않고도 좋은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다운이가 복지관에서 무엇이든 배워 오면 엄마는 손수 장난감을 만들어 복습하도록 해 줬다.

돈에 아이를 맡기고 ‘가나다라’식 학습에만 집착했던 엄마에서 아이의 마음을 읽는 엄마로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엄마가 달라지자 아이도 달라졌다. 혼자서 머리도 감고, 가까운 곳에 심부름도 간다. 돌발행동을 하는 것 역시 엄마의 노력 덕분에 아이의 자아가 많이 생겼다는 신호라고 했다.

그렇게 자폐 1급의 아들을 잘 키워 냈다는 입소문은 어느새 번졌고, 공부방 아이들도 하나 둘 늘었다. 손씨가 운영하는 서울 사당동의 작은 공부방엔 어느덧 식구가 10명이다. 지적장애·다운증후군·발달장애 아이들의 가정은 대부분 저소득층이다. 하교하는 아이들을 일일이 태워 공부방으로 데려오고, 수준에 맞춰 공부를 지도하고, 저녁을 손수 지어 먹인다. 오후 9시가 돼서야 집으로 데려다 준다. 엄마 손씨의 넓은 품으로 더 많은 자식이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그러나 손씨는 아이들에게 살가운 엄마는 아니다. 오히려 툭툭 내뱉는 말투다. 다운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비장애 아이들 틈에 섞이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자극을 주기 위해서다. 그 마음을 아는 것일까. 아이들은 ‘엄마’가 일반 입시학원으로 강의하러 가는 날을 가장 좋아한다. 학원장이 공부방 아이들에게 비장애 친구들은 어떻게 공부하는지를 볼 수 있도록 배려해 줬기 때문이다. “친구들 좀 봐라, 저렇게 열심히 공부하는데 너희들은 놀아야 되겠어?” 엄마의 호통소리도 바깥세상으로 나온 아이들의 즐거움을 막진 못한다.

공부방 아이들이 사회에 섞여 당당한 사회인으로 자립해 살아가기란 분명 쉽지 않을 것이다. 다운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경험한 것처럼. 다운이는 같은 반 친구로부터 “무조건 싫다”는 말을 들었다. 아들의 상처를 엄마의 사랑으로 치유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던 엄마는 맥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내 아들이 중학생 교복을 입고 운동장을 걸어가는 걸 보는 게 꿈이었던 엄마는 그날로 일반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참, 어이없죠. 왜 그때 그 어린아이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을까요. 조금 더 마음을 강하게 먹었어야 했는데….”

그러나 손씨는 요즘 아이가 자전거 타는 모습을 보며 다시 웃는다. 3년 전에 배우기 시작한 자전거로 120㎞ 트레킹도 해냈다. 일주일에 한 번. 자전거를 타며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자전거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문이 더 넓어지길 바랄 뿐이다. 다운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자전거로 가족 여행을 떠나고 싶어 자신도 자전거를 배웠다는 손씨. 공부방 아이들과 다운이를 위해 시간을 쪼개 쓰느라 하루 24시간이 모자란다.

“딸에겐 정말 못된 엄마였어요. 그런데 딸아이 스스로 상처를 잘 이겨 낸 것 같아요. 오히려 저를 위로해 주는 든든한 존재입니다.” 그런 딸이 몇 달 후면 호주로 유학을 떠난다. 반듯하게 잘 자라 스스로 미래를 계획하는 딸이 고맙기만 하다. 아들을 위해 어렵게 저축해 놓은 돈을 유학비에 보태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동생의 미래를 잠시 빌려 주는 거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지만 분명 더 아픈 손가락은 있어요.”

손씨는 바쁜 와중에도 짬이 나면 천상병·박완서의 책을 꺼내 든다. 아이들을 태우고 오가는 차 안에선 음악을 듣는다. 눈물도 많다. 어쩌면 그 ‘눈물’이 아이의 마음을 예민하게 읽을 줄 아는 엄마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둔감한 엄마는 아이의 마음을 읽어 주지 못하니 눈물 흘릴 일도 많지 않다. 흘린 눈물만큼 웃을 일도 많은 엄마. ‘모성’이 출산한 모든 여자에게 생기는 것이라지만 그 모성은 온전한 것이 아니리라. 아이들이 자라는 만큼 모성 역시 성장한다. 손씨의 모성은 9년 동안 훌쩍 자랐고, 시련과 아픔 속에서 더 강해졌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가 사는 이유는 딸이 있어서고, 내가 살아야 되는 아들이 있어섭니다. 다운이 덕분에 철없던 엄마가 직업도 갖고 됐고 사회복지학을 공부할 꿈까지 꾸게 됐습니다.”

엄마로서가 아니라 여자로서 행복하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제 남편은 평생 주고 갈 사랑을 한꺼번에 주고 갔어요. 저를 이렇게 키워 줬잖아요. 그 추억을 꺼내 보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제 운전석 옆자리엔 절대 딴 남자는 못 탑니다. 제 아들만 빼고요. 하하.” 그의 웃음소리는 참 맑았다.


박정애(36).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SBS『리얼코리아』『TV 아름다운 가게』『긴급출동 SOS 24』, EBS『희망풍경』등 방송 프로그램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 중이다. 5세 아들 이우준을 키우는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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