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된 꿈, 자녀 성공으로 보상받으려는 대리만족의 심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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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호 22면

유독 대한민국 어머니의 힘, 모성애가 강한 이유가 뭘까. 설문 응답자 가운데 상당수가 유교적 전통에서 그 뿌리를 찾았다. 여성들이 사회 활동 전면에 나서는 게 억압되고, 가족·가문을 위해 대신 희생하고, 자녀 교육에 전념하는 여인상을 강요한 유교 이데올로기의 영향 때문이란 분석이다. 소설가 박정애씨는 “가부장적 전통에서 여자는 결혼하면 (시가의) 최말단 계급으로 생존해야 했다”며 “아이를 낳아야 비로소 시가와의 혈연 관계가 생성됐고 생존과 관련된 이런 절박함이 한국 엄마들의 유전자에 새겨진 것 같다”고 했다. “조선시대부터 여자에겐 자신보다 남편·시부모·자식이 중요하다는 사고 방식이 몸에 뱄기 때문”(김숙진씨)이라거나 “엄마가 되면 자식과 가족을 위해 무조건 희생해야 한다는 가부장제적 교육의 영향 때문”(노인엽씨)이란 응답도 있었다.

대한민국 엄마들, 왜 강할까

의사 차미경씨는 “희생정신과 책임감, 강한 정신력을 최고의 도덕적 이념으로 삼았던 유교에 바탕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남상명씨 역시 “남존여비가 엄격했던 조선시대 자식 교육은 어머니의 몫이었다”며 “차별의 시대에 축적된 어머니의 강인함과 자식 교육의 열정이 주도권이 어머니에게로 넘어온 현대 한국 사회에서 빅뱅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대해 연세대 김호기(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엄마의 강인함은 같은 유교 문화권인 중국·일본·베트남과는 또 다른 독특한 현상”이라며 “유교적 전통 외에 분단과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등 격동의 한국사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급변기엔 여성들이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마련되지 않았고, 그 결과 자녀를 통해 자신의 꿈과 욕망을 성취하는 사회적 대리만족 구조가 형성된 것이란 분석이다.

세명대 박소영(사회복지학과) 교수도 “여성에 대한 고등교육이 보편화되면서 자아실현에 대한 의지가 높아진 것도 헌신적이고 강인한 엄마가 양산되는 데 한몫한 것 같다”고 말한다. 박 교수는 “교육을 통해 여성들이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고 억눌려 온 자아를 찾고 분출할 기회를 찾았지만, 사회는 여전히 여성들이 자식 양육에 전념하길 기대했다”며 “여성들은 자식 뒷바라지를 전문적으로 하는 것을 자아실현의 한 통로로 삼게 된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이번 설문에서 응답자의 상당수는 자녀를 통한 대리만족의 성취가 강한 엄마를 만든 원동력이라고 대답했다.“열악한 조건과 성차별, 꿈의 좌절을 딛고 스스로 선택한 자기희생”(한나라당 전여옥 의원),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공정한 사회구조 때문에 자신이 이룰 수 없었던 것을 자식을 통해 이뤄야겠다는 대리욕구가 강하게 형성됐다”(치과의사 백승엽씨), “자식의 성공 여부가 엄마 인생의 성공 여부와 직결된다고 느끼기 때문에 강력한 에너지로 자식을 서포트한다”(주부 김가혜씨) 등.
가난과 수난의 역사에서 원인을 찾는 이들도 있었다.

주호영 특임장관은 “가난하고 못 배운 자신의 설움과 고통 속에서 자식은 잘살게 하겠다는 열의가 역동적인 국민성과 합쳐져 남다른 교육열로 이어졌다”고 했고, 민주당 박선숙 의원은 “우여곡절 많은 역사 속에서 아이들 때문에 버티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엄마들이 강하게 단련된 것”이라고 해석했다.‘강한 엄마’가 반드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다. ‘강한 엄마’라는 찬사 뒤에 가려진 부작용도 지적됐다.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안지은씨는 “외국 엄마들은 자식이 주는 즐거움을 얘기하지만 한국 엄마들은 자식을 어떻게 도울까를 얘기한다. 외국 사람은 자식이 크게 성공하지 못해도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한국 엄마들은 다르다고 했다. 자녀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나친 출세 지향주의의 부작용을 지적한 것이다.

박소영 교수는 “엄마와 자식이 인생에서 추구하는 바가 같을 경우엔 헌신적인 엄마가 존경과 고마움의 대상이 되지만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다를 때는 엄마의 헌신 정도가 클수록 자식은 숨이 막히거나 그 삶이 왜곡될 수 있다”며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선 자식의 인생을 나의 인생과 분리시켜 생각하는 분화(differentiation)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선 부모·자녀 관계보다는 부부 관계가 가족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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