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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폭동 18주년… 그때 그 사람들

중앙일보

입력

미주중앙
LA폭동은 한인들이 일궈온 아메리칸 드림을 하루 아침에 한줌의 재로 만든 사건이다. 1992년 4월29일부터 6일간 지속된 폭동으로 53명이 사망하고 20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3000건이 넘는 화재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집계된 재산 피해액은 7억달러 그중 절반 정도가 한인들이 입은 피해액이다. 이 폭동으로 한인사회는 결속력과 인종화합이라는 것을 배우게 됐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폭동에 대한 의미와 교훈은 퇴색되어 가고 있다. 이에 4.29 폭동 주요 인물의 삶을 통해 18주년을 맞은 LA폭동의 의미를 다시 짚어 본다.

첫날(29일) 폭동발생

-평결이 발표된 것이 오후 3시15분 흑인 밀집 거주지역 사우스센트럴 지역에서 300여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 항의시위를 하더니 순식간에 폭도로 변했다.

오후 5시~6시경에는 이미 진압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번졌다. 오후 7시경 당시 데럴 게이츠 LAPD국장은 보고를 받고도 기금 모금 파티에 참석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둘째날(30일) 이재성군 사망

-방화와 약탈행위가 극렬해져 당시 피트 윌슨 가주 주지사는 2000명의 주방위군 투입을 명령했지만 군수물자 부족으로 24시간이 지난 후에야 투입됐다. 경찰이 한인타운를 버리자 한인들은 자신들의 생활터전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을 하고 폭도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그와중에 이재성군은 폭도로 오인 받아 사망했다.

셋째날(5월1일) 주방위군 증원

-윌슨 가주 주지사는 주방위군을 4000명으로 증원하고 연방정부에 도움을 청했다.

넷째날(2일) 한인타운 평화행진

-폭동 종식을 호소하는 한인 3만여명이 LA한인타운에서 평화행진을 벌였다.

다섯째날(3일) 폭동 진압

-톰 브래들리 당시 LA시장은 폭동이 통제되고 있다고 공표했다.

여섯째날(4일) 폭동 종식

-브래들리 시장은 폭동 종식을 선언했다. 그러나 며칠동안 수건의 폭력사건은 지속됐다.

대럴 게이츠 전 국장, 췌장암 투병후 83세에 사망

부자들의 동네 베벌리힐스 주변에 방어선을 펴 애꿎은 한인타운 피해가 커졌다는 비난을 받았던 대럴 게이츠 전 LAPD경찰국장은 LA폭동 18주년을 보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1949년에 민중을 지키는 파순꾼이 되겠다고 선서를 하고 경찰에 입문했던 게이츠는 초고속으로 1978년 경찰국장에 올랐다. 그는 재임기간중에 같은 경찰 출신인 톰 브래들리 전 LA시장과 갈등을 빚어왔다.

폭동이 일어난 그날 저녁에도 시장이 제안한 경찰 개혁안에 반대하기 위한 기금모금 파티에 가던 중이었다. 그런 보고를 받고도 파티에 참석해 논란이 됐었다.

결국 그는 폭동건으로 스스로 사임한 후 PC게임 제작사 시에라의 어드벤처 게임인 '폴리스 퀘스트: 오픈 시즌'과 SWAT의 크리에이터로 참여 경찰 자문과 시나리오 작성을 도왔다.

그는 또 로컬 라디오 방송국에서 토크쇼 진행자로 짧게 남아 활동했으며 보안회사 글로벌 이포인트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는 췌장암으로 투병생활중 83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장례식은 지난 4월27일 치뤄졌다.

앤젤라 오 변호사, 차세대 리더십 교육에 앞장

"지금은 한인청소년들이 나쁜길로 빠지지 않도록 안내해주고 리더십을 기를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어요."

1992년 LA폭동때 한인사회의 입이 되어 주었던 한인여성 앤젤라 오 변호사. 지금 웨스턴저스티스센터재단(WJCF)의 이그제큐티브 디렉터로서 중재활동과 커뮤니티 교육에 앞장서고 있다.

주류 언론들이 LA폭동의 발생원인을 한흑갈등으로 몰아가기 위해 흑인사회만 일방적으로 취재한 후 편파적으로 보도했다. 특히 ABC의 간판 프로그램이였던 나이트라인의 앵커 테드 커플과의 대담에서 당당하게 한인사회의 입장을 올바르게 대변하여 왜곡보도를 바로 잡았다.

1997년엔 폭동피해 현장을 찾기도 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설치한 인종자문위원회에서 일하기도 했다.

오 변호사는 "클린턴 대통령은 매우 현명한 분이었고 진심으로 인종간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었다"며 "하지만 초점을 흑백갈등에서 다인종으로 확대할 것을 조언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로드니 킹, 마약·폭력으로 수차례 체포

로드니 킹은 1991년 3월2일 과속과 음주운전으로 체포됐다. 체포됐을 당시 백인 경찰관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했고 그 장면이 추후에 공개되면서 해당 경찰관들이 기소됐지만 무죄 평결을 받는 바람에 사우스 센트럴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이후 소송을 제기 1994년에 그는 시당국으로부터 합의금 380만 달러를 받아 90년대 후반에 힙합음악 업체를 차렸다가 얼마되지 않아 사업을 접었다.

1993년 음주운전으로 경찰에 체포돼 집행유예와 함께 알코올 중독 재활프로그램을 강제로 받았다. 1999년엔 부인 폭행죄로 5년의 보호감찰형을 받았고 2001년 8월과 9월 두달새 마약복용과 난폭 행위로 세 번이나 체포됐었다. 2003년엔 술을 먹고 운전하고 가다 주택가로 돌진하는 사고룰 일으키는 등 끊임없이 말썽을 피워왔다.

그가 다시 대중에게 모습을 나타낸 것은 2008~2009년 리얼리티 쇼프로에 출연하면서 자신의 최근 근황을 전했다. 2009년 9월에는 필라델피아의 한 특설 링에서 경찰 출신의 시몬 아우어드와 벌인 3라운드 권투 경기에서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기도 했다.

고 이재성군 어머니 이정희씨, 아들 희생 기리며 장학회 설립

2010년 5월 어느날 30대 가장이 부인 딸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네 식구와 오붓하게 식탁에 둘러 앉아 37개의 초가 꽂힌 생일케이크를 보며 생일 축하노래를 부르고 있다.

18년전 유일한 한인 희생자 이재성군이 1992년 4월30일 사망하지만 않았어도 그의 생일 파티 모습이었을 수도 있다.

재성군의 어머니 이정희씨는 가게를 지키겠다며 뛰어나간 아들의 마지막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생지옥이었던 18년전의 폭동 와중에서 유일하게 희생당한 한인이인 재성군은 남보다 의협심이 강했다. 폭동이 극렬해 졌지만 주방위군 투입 지연과 경찰의 한인타운을 포기했을 당시 '우리 가게는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며 친구들과 함께 위험에 처한 타운내 한인 가게를 찾아다니며 힘을 보탰다. 그날 밤 약탈 위험에 처한 또다른 식당으로 향하던중 한인경비대가 폭도로 오인해 발사한 총에 맞아 숨지고 말았다.

폭동이 점차 사람들 기억속에서 사라지고 인종화합에 앞장서자던 구호가 퇴색돼가는 현실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이씨는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무감으로 10만달러를 모아 장학회를 만들었다.

피트윌슨 전 주지사, 대선서 '쓴잔'…정계 은퇴

'직면한 재정적자로 무상재해보상은 불가능합니다.'

7억 달러의 재산 피해중 절반이상의 피해가 한인이었지만 당시 피트 윌슨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1992년 5월4일 임시본부가 설치된 LA한인총영사관에서 한인피해자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예산부족으로 무상재해보상은 불가능하지만 피해자들이 민간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정부가 보증을 서주겠다"고 밝혔다.

LA폭동이 진압된 후 피폐해진 LA시를 재건하는데 그는 총력을 기울였다. 윌슨 전 주지사는 1991년에 가주 주지사가 되어 1999년 1월까지 재임했다. 그는 1996년 대통령 선거에 나갔다가 고배의 쓴잔을 마시고 주지사 임기를 마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는 이후 LA 소재 머천트 은행인 퍼시픽 캐피털 그룹에 매니징 디렉터로 2년간 재직했고 어바인 소재 US텔리퍼시픽 사 IDT엔터테인먼트 등의 회사에서 어드바이저를 역임했고 현재는 스탠포드대내 씽크탱크인 후버인스티투션에서 교환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USA 중앙일보

미주 중앙일보 진성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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