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리뷰]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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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국에도 두터운 팬층을 갖고 있는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관을 포괄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책이 신간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이다.

책의 앞부분에서 시오노는 『로마인 이야기』 빅 히트 이후 '왜 고대 로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고 밝힌다.

그때 그의 대답은 '르네상스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 이었다. '그렇다면 왜 르네상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이 이어지는데 신간의 전체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쓰여졌다.

즉 이 책은 한마디로 르네상스 정신의 본질에 대한 탐색이고, 수많은 저술을 관통하는 그의 '현재적 관심' 의 노출이다.

바꿔 말하면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녀의 독특한 문체의 비밀에 대한 열쇠라고 할 수도 있다. 실은 시오노는 처녀작 『르네상스의 여인들』을 비롯해 『바다의 도시 이야기』『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등 일련의 르네상스 관련 저술을 냈다.

신간은 그의 기존 르네상스 저술을 망라해 7권으로 기획한 '르네상스 저작집' 의 입문서에 해당한다. 일본에서 올 4월에 첫 출간된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책이다.

총 7권 중 2~6권이 기존의 저술을 보완해 낼 예정인데 반해, 새로 쓴 이 1권은 독자들의 질문을 토대로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 형식을 취해 자신의 르네상스관을 피력하는 서술방식이다. 옮긴이 김석희씨의 유려한 문장도 책읽기에 도움이 된다.

그러면 왜 시오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관심을 가졌을까? 시오노는 '우리 시대의 르네상스' 를 희구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를 지배한 서양의 사유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해 새로운 가치를 탐색하는 그가 중세 기독교 가치관이 무너지는 사태에 직면해 역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려 했던 르네상스 시기 천재들의 삶과 사상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의 출발점은 우리 시대 르네상스 부활이고, 그것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천착하게 한 동력이며 나아가 고대 로마에로까지 소급되는 것이다.

현재에의 관심은 과거의 사실(事實)들 사이사이를 이어주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접착제가 단순히 글을 매끄럽게 하는 양념이 아니라, 물리적 사건으로만 방치되어 있던 사실(事實)들에 숨을 불어 넣어 '생동하는 사실(史實)' 로 만드는 힘으로 작용한다.

이런 양념들이 정통 학계에서 볼 땐 검증되지 않은 사관(史觀)으로 비판받을 수도 있지만, 수많은 보통 독자들이 그의 책을 통해 생생한 책읽기 경험과 함께 영감을 얻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인들이 당시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보편언어였던 라틴어로 글을 쓰지 않고 범인들의 이탈리아어로 써서 광범한 호응을 불러 일으킨 것처럼 시오노도 기존의 문법을 탈피해 독자를 맞상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욱이 시오노가 자신의 사담(私談)을 황당하게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휴머니즘에 대한 갈증을 바탕에 깔고 재미와 교양을 무기로 시공을 초월한 르네상스의 보편성을 설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화와 대화의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는 이 시대에 참고할 가치가 충분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천재들의 인물사(人物史)인 이 책에서 시오노가 특히 주목하는 이는 프란체스코와 프리드리히 2세다. 13세기 전반을 산 종교인과 정치인인 두 사람을 시오노는 최초의 르네상스인으로 꼽는다.

이들은 기독교의 가치를 송두리째 부정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서양 중세의 종교적 질곡을 뛰어넘어 기존의 사고방식에 의문을 품고 그것을 공언할 용기를 가진 최초의 인물" 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부정한 것은 성직자 계급의 특권이었고 옹호한 것은 종교적 자유였다.

이러한 신설(新說)은 흔히 14세기의 작가 단테나 미술가 조토를 최초로 꼽는 것과 다르게 르네상스의 출발을 한 세기 앞당긴 것이다. 문예부흥으로도 불리는 르네상스 예술의 꽃이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에 이르러 만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정지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 시오노의 시각이다.

시오노가 보는 르네상스의 보편성은 무엇인가. "보고 싶고,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의 분출이 르네상스 정신운동의 본질이다. " 한마디로 현상을 지배하는 질서를 알고 싶어하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왜' 라고 묻는 것으로 나타난다.

'왜' 라고 묻는 사람은 모두 르네상스의 보편적 정신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굳이 프란체스코와 프리드리히 2세만 언급할 것도 없다. 그들은 시오노의 손길이 닿아 새롭게 부각된 인물일 뿐이다. 어느 시대나 르네상스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움직임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작 우리의 관심은 무엇인가.

동양인으로 서양 르네상스의 한 복판에서 30년을 버티며 제 목소리를 내온 시오노의 마지막 언급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르네상스 정신을 동아시아 전통의 심안(心眼)이나 극기(克己)와 치환시키려는 것이다. 이 작업을 구체화하는 일은 시오노의 문제의식을 딛고 새 르네상스의 꽃을 피울 후학들의 과제일 것이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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