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KB회장 ‘금융 히딩크’를 찾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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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얼마 전 저녁 자리에서 공석 중인 KB금융 회장이 화제가 됐다. 첫 질문부터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도덕성을 갖춰야 한다. 개혁성이 우선이다. 비전이 뛰어나야 한다.’ 우선 순위만 달랐지 내용은 대충 비슷했다.

“그런 인물이 누굽니까.”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서로 눈치만 봤다. 모인 이들은 전 KB금융 임원, 금융 당국 간부, 고위 관료였다. 금융계 인맥을 줄줄 꿰는 이들이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꼽은 조건을 만족할 마땅한 인물이 좀체 떠오르지 않았다는 얘기다. 조건을 좀 낮춰보자고 했다. 그제야 몇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

“그중 누가 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두 사람을 꼽았다. 이유를 물었다. 한 사람은 힘이 셌다. 힘은 권력과의 거리에서 나오는데 권력 최고위층과 많이 가깝다는 것이다. 또 한 사람 역시 ‘청와대가 반대하지 않는다’가 첫째 이유였다. 두 번째는 ‘국민들이 보기에 괜찮다’였다. 전문성은 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조금 전 꼽았던 도덕성·개혁성·비전도 의미가 없었다. 그런 사실을 지적하자 좌중은 피식 실소했다. 의도했던 나라걱정·경제걱정은커녕 저잣거리의 가담항어(街談巷語)만도 못한 얘기들을 나누고 있었던 셈이다.

그래도 미련이 남았다. 이왕 말을 꺼냈으니 적임자를 뽑을 해법을 하나씩 내놔보자며 의기투합했다. 첫 해법은 전 KB금융 임원이 꺼냈다. 그는 공모를 통해 회장을 선출해야 한다고 했다. 현재 KB금융의 많은 문제들은 사외이사들끼리 밀실에서 회장을 뽑는 바람에 생겼다. 그는 “(관치 금융 논란을 불렀지만) 황영기·강정원 파문의 본질은 밀실 인사다. 회장 선출권을 쥔 사외이사 표를 잡는 데만 신경 쓰다 보니 무리수를 많이 두게 됐다”고 말했다. 이런 부작용을 없애는 데는 공모가 제격이란 것이다. 공모는 또 권력의 간섭을 막는 데도 유용하다.

해법 두 번째는 금융당국 간부가 내놨다. 부적격자 지우기다. 적임자를 찾기 어렵다면 안 되는 쪽부터 걸러내고 남는 인물 중에 고르자는 것이다. 우선 관료 출신은 제외다. 자칫 또 한 차례 관치금융 논란을 부를 수 있어서다. 내부 인사도 안 된다. KB개혁의 핵심과제 중 하나가 파벌 타파다. 주택·국민은행이 합병한 지 10년이 다 됐지만 내부 파벌 문제는 여전히 골칫거리다. 파벌청소를 제대로 하려면 어느 한쪽 출신이어선 안 된다. KB금융과 거래관계 등 연관이 있는 이도 탈락이다. 봐줘야 할 사람이 많으면 개혁하기 어렵다는 건 상식이다.

정부 고위 관료가 세 번째 해법을 던졌다. 속도였다. 그는 “6·2 지방선거 전에 회장 선출을 마쳐야 한다”고 말했다. 선거가 끝나면 논공행상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때 낙선자들에 대한 배려는 필수다. KB금융 회장 자리만큼 낙선자 위문용으로 안성맞춤인 자리도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미 금융가에선 그럴듯한 소문도 나돈다. 관계의 거물급 인사 모씨가 출마하는데 낙선을 대비해 KB회장 자리를 비워두고 있다, 그 바람에 KB회장 자리가 반년 넘게 비어 있다며.

이것저것 빼다 보니 남은 결론은 ‘금융 히딩크’로 모아졌다. 히딩크가 선수끼리 반말을 하게 해 축구계의 고질 파벌을 뿌리뽑은 얘기는 유명하다. 신세 진 것 없으니 봐줄 사람 없고 관치에서도 자유롭다. 승리의 경험이 있으니 이기는 법을 안다. 세계의 톱 뱅크를 꿈꾸는 KB금융에 금융 히딩크가 필요한 이유다. 마침 월가에도 구조조정의 바람이 거세다. 적당한 인물을 비교적 싸게 영입할 기회란 얘기다. 외국계 헤드헌팅사 관계자는 “한국 금융에 관심 있는 이가 많다”고 말했다. 언어도 큰 문제가 안 된다. 한국 근무 경험이 있는 이도 많아졌다.

모레는 KB금융의 정기 이사회다. 지난해 밀실 논란을 빚었던 사외이사들이 대거 물갈이 된 후 열리는 첫 이사회이기도 하다. 아직 회장 선임 관련 안건이 올라갔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회장을 어떻게, 언제 뽑을지 논의를 바로 시작해야 한다. 이미 많이 늦었다.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