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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특허 소유권은 과학기술자가 우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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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연구비를 받은 기업에 특허 소유권을 넘겨줬다가 아예 해당 연구를 접은 일도 있었어요.”

“돈 댄 곳이 특허에 대한 사용권만 요구하는 것이 대학이나 정부출연연구소의 과학기술자와 산업계가 상생할 수 있는 길입니다.”

과학의 달을 맞아 본지가 ‘과학 생태계 변해야 미래 있다’는 3회 시리즈를 지난주 연재한 뒤 기자에겐 이런 내용의 하소연과 제언이 쏟아졌다. 박영아(한나라당) 의원은 “심각한 문제가 오래 방치돼 왔다. 토론회를 열어 개선 방향을 찾겠다”고도 했다. 돈을 댄 기업이 특허권을 가져가는 관행은 과학기술계에선 오랜 고민거리였지만 제대로 공론화된 적이 없었다. 연구비라는 칼자루를 쥔 쪽에 함부로 따지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본지 4월 20일자 E2, E3면>

한 이공계 교수는 자신의 전공 분야를 포기해야 했던 쓰라린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그는 1990년대에 인공지능 자동제어의 권위자로 꼽혔다. 한 대기업에서 관련 연구비를 받은 뒤 그 결과물인 특허의 소유권을 넘겨줬다. 연구비를 받는 전제조건으로 예나 지금이나 당연시됐다. 그 기업은 해당 특허를 활용해 특정 기기 분야에서 세계 두 번째 상용화를 이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다른 기업이 그 교수에게 차세대 시스템을 개발하자고 제안했지만 응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기술의 뿌리가 처음 특허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 나중에 특허 분쟁이 일어날 것이 뻔했다. 자신의 장기를 접고 다른 연관 분야를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은 특정인에게 큰 타격일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첨단산업 육성의 토양을 척박하게 만든다.

어느 한쪽의 이득이 너무 두드러진 협력관계는 오래 가지 못한다. 식물의 경우를 보자. 이로움을 공유하는 상리공생(相利共生)은 오래가지만 영양분을 뺏어만 가는 기생은 결국 숙주는 물론 기생 식물도 시들게 만든다. 고도의 지적 교류가 이뤄지는 과학기술의 연구개발 생태계라면 말할 나위도 없다. 미국 마이크로소프트나 GE는 한국의 대학에 연구비를 지원하면서 특허를 내놓으라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무슨 자선사업을 하거나 특별히 관대해서가 아니다. ‘윈윈’하는 방법을 잘 알기 때문이다. 미국의 산학협동은 기업이 대학이나 개별 연구소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는 것이 장기적으로 좋다는 걸 터득한 것이다.

이번 취재를 통해 과학기술계는 산업계가 좀 더 여유 있는 마음을 갖길 기대한다는 걸 느꼈다. 국경 없는 기술개발 경쟁에서 원천기술이 절박하고 또 경쟁사보다 특허 실적을 많이 쌓아놓아야 하겠지만 시야를 조금 넓히면 과학자들은 산업계를 지속적으로 살찌울 인재풀이다. 연구기관들도 지원금이 큰 연구과제 잘 따오는 순서로 과학자들을 줄 세우는 일부 관행을 재고할 때다. 과학기술자의 창의성에 제값을 쳐 줘야 한다.

박방주 과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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