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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유언(遺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중국 공산당 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 취추바이(瞿秋白)는 1935년 국민당 군대에 체포돼 그해 6월 처형된다.

죽기 전 그가 남긴 '사족(蛇足)' 이란 제목의 유언장은 "자, 이제 어설픈 연기는 끝났고, 무대는 텅 비었다. 떠나기 싫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라는 탄식으로 시작된다.

유서에 그는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 목록을 남겼다. 고리키의 『클림 삼긴의 생애』, 투르게네프의 『루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루쉰(魯迅)의 『아Q정전』, 조설근의 『홍루몽』…. "중국 두부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 가 유서의 마지막 구절이다.

루쉰도 유언을 남겼다. 36년 10월 상하이(上海)에서 병사(病死)하기 한달쯤 전 그가 작성한 유서에는 가족에 대한 일곱가지 당부가 담겨 있다.

'장례 때 오랜 친구들 말고는 아무한테도 돈을 받지 마라' 에서 '나를 잊어버리고 너희 자신들 일이나 보살펴라'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허울 좋은 소설가나 예술가는 되지 마라' '복수를 반대하고 인내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라' 는 당부에 이르기까지 파란 많은 인생역정의 끝에 선 지식인의 회한이 스며 있다.

죽음을 앞두고 인간은 보통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부정과 고립의 단계에서 분노의 단계, 타협의 단계, 우울의 단계를 거쳐 마지막으로 수용의 단계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적어도 정상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거치는 단계다.

예고된 죽음이었기에 취추바이는 유서에서 추천도서 목록을 말할 수 있었고, 루쉰은 가족에 대한 당부의 말도 할 수 있었다. 전혀 예기치 않은 죽음, 불시에 닥친 죽음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떠올리는 것일까.

생각하기도 끔찍한 '9.11 테러' 대참사 당시 자살폭탄으로 돌변한 여객기에 탑승했던 승객들과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갇혀 있었던 희생자들이 남긴 유언이 뒤늦게 언론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그들은 죽음을 직감하고 부지런히 휴대폰을 눌렀다.

그들이 찾은 사람은 아내.남편.자식 등 사랑하는 가족이었다. "여보, 사랑해. 우리 딸 에미도 정말 사랑해. 당신이 남은 인생에서 어떤 결정을 하든 당신은 행복해야 돼" "여보, 나 브라이언이야. 상황이 아주 안좋은 것 같아. 최선을 다해 인생 즐겁게 살아. 사랑해, 여보. " "여보, 사랑해. 나는 아무래도 살 수 없을 것 같아. 아이들 잘 부탁해. " 산산이 부서진 그들의 마지막 절규가 가슴을 저민다.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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