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명인전 첫판은 '신수 시범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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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유창혁9단이 이창호9단의 대마를 잡으며 '명인' 사냥에 나섰다.

삼성화재배 16강전에서 중국의 마샤오춘(馬曉春)9단에게 패배한 이후 한동안 슬럼프겠거니 싶었는데 유9단은 주위의 예상을 비웃듯 패왕전 3연승에 이어 SK엔크린배 명인전 도전기에서도 강적 이창호를 상대로 멋진 신수(新手)를 구사하며 산뜻한 출발을 보였다.

명인전 도전기는 애당초 최강 이창호9단의 방어 여부보다 도전자 유창혁9단이 어느 정도 싸워주느냐가 관심의 초점이었다.

유9단은 지난해 삼성화재배 우승에 이어 올해 춘란배를 제패하여 세계대회에선 쾌조의 컨디션을 보였으나 이상하게도 국내 타이틀은 하나도 따내지 못했다.

이세돌3단에게 '배달왕' 을 빼앗긴 뒤 올해 기성전에서 이창호9단에게 도전했으나 1대3으로 완패했다.

왕위전은 예선에서 탈락하여 본선에 오르지도 못했고 천원전과 기성전에선 박영훈2단, 조한승4단 등 어린 신예들에게 일격을 얻어맞고 말았다. 명인전에서도 조훈현9단과의 일진일퇴 끝에 간신히 도전권을 잡았다.

13일 한국기원에서 시작된 명인전 첫판은 처음부터 신수(新手)의 경연장이 됐다.

'기보' 를 보면 이창호9단이 둔 백8이 최근 연구된 신수이며 유9단이 흑9에 붙여 13까지 둔 수는 이 판에서 처음 시도된 신수였다.

8은 예전엔 '늘어진 수' 라 하여 철저한 기피대상이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발빠른 수' 라 하여 호감을 얻고 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감각도 변한 것이다.

9에 붙이는 수는 옛날에 기성 우칭위안(吳淸源)9단이 가끔 시도한 수이긴 하나 우하 쪽이 소목인 경우는 이 판이 처음이다. 두터운 기풍의 유9단이 이처럼 처음부터 스피드를 강조한 것은 '이창호에게 실리에서 밀려서는 이기기 힘들다' 는 인식의 소산이었다.

유9단은 그러나 중반 이후 두텁고 느릿한 공격으로 이9단의 대마를 잡아 불과 1백51수 만에 불계승을 거두게 된다. 이9단은 초읽기에 몰리며 마지막 1분까지 사력을 다했으나 유9단은 이날 따라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국제무대에선 펄펄 날지만 국내에선 무관(無冠)인 유9단이다. 그러나 유9단의 골수 팬들은 유9단이 국제무대에서 우승하는 것은 실력이 강해서이고 국내에서 잘 지는 것은 상금이 적은 데서 오는 특유의 방심 탓이라고 본다. 우승상금 2천8백만원인 명인전은 어떻게 될까.

이창호는 여전히 무적이다. 그러나 유9단은 패왕전 본선에서도 조훈현9단을 꺾는 등 3연승의 호조를 보이고 있다. 또한 명인전에서도 첫판을 이겨 5대5 승부를 만들었다. 2국은 22일 울산에서 벌어진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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