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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대는 봄이 피아노 건반 위에 앉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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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데뷔 15년 만에 처음으로 피아노 연주 앨범을 낸 가수 정재형. 그는 “작곡가로서는 물론 피아노 연주자로서도 많이 배우고 성장한 음반”이라고했다. [박종근 기자]

음악은 종종 시의 대명사다. 악기 홀로 노래하는 연주곡을 듣더라도 시 한 편 읽은 듯 마음의 줄이 요동칠 때가 있다. 대중가요와 클래식을 넘나드는 뮤지션 정재형이 최근 그런 시적인 음반을 냈다. 앨범 전체를 피아노 연주로만 채운 4집 ‘르 쁘띠 피아노(Le Petit Piano)’다.

전반적으론 정적인 느낌이 강한 음반이다. 피아노를 격렬하게 연주하던 그룹 베이시스 시절이나 전작의 일렉트로닉 사운드로부터 달아난 모습이다. 폭풍우 치는 여름에서 산들대는 봄으로 한발 물러선 자태랄까. 잔잔하게 시작해 포르르 끝나는 이 음반은 요란한 아이돌 중심 시장에서 각종 음반 차트 5~6위에 오르며 조용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시골 풍경을 떠올리며 곡을 썼어요. 어느 순간 돌아보니 저 혼자만 죽어라 달려온 것 같더라고요. 이번엔 저를 좋아하는 분들을 위로하는 음악을 만들고자 애썼습니다.”

한양대 작곡과 출신인 그는 대중음악보다 클래식이 더 친숙했다. 그러다 대학 시절에 그룹 베이시스로 갑자기 대중 가수로 데뷔했다.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 ‘작별의식’ 등 히트곡을 쏟아냈다. 그는 “영화음악의 발판을 마련하려고 대중음악을 시작했다”고 했다.

가수로서 정상을 넘보던 1999년 그는 돌연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 파리 고등사범음악원에서 영화음악과 클래식 작곡을 공부했다. 이 때의 경험이 이번 음반의 토대가 됐다. 뉴에이지라 보기엔 무겁고 정통 클래식으로 보기엔 다소 가벼운 이번 앨범엔 가수 정재형과 클래식 작곡가 정재형의 감성이 두루 섞여있다.

“대중과의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대중음악을 하는 작곡가로서 클래식을 연주하면 어떤 느낌이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죠.”

그는 앨범마다 슬럼프를 겪을 정도로 끙끙대며 곡을 쓰는 편이라고 했다. 몸이 무너지는 순간을 몇 차례나 겪고 나서야 음악이 고개를 내미는 식이라고 한다. 그런 숨막히는 고통의 대가일까. 이번 앨범에 대해 “피아노가 숨쉬는 소리까지 들린다”(이적) 등 동료 뮤지션의 극찬이 이어지고 있다.

“오랜만에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음반을 냈다는 평이 많더라고요. 많은 사람을 위로하고 싶었던 제 뜻이 전달된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어찌 보면 그는 우리 대중음악계에서 보기 드문 경계인이다. 잔잔한 피아노에서 음울한 영화음악으로, 또 격렬한 일렉트로닉 사운드로 온갖 음악의 경계를 넘나드니까. 이 명민한 ‘경계 뮤지션’은 다음 앨범에선 다시 마이크를 잡을 생각이다. “늘 부딪히며 성장해가는 음악 인생을 살고 싶다”고 했다.

글=정강현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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