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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한류의 꿈, 공예문화상품 ④ 황갑순 서울대 교수의 ‘햅틱-연마 도자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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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2면

글=양선희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자기를 연마해 촉감을 얻었다

황갑순 교수가 그의 대표작인 화병을 들어서 보고 있다.

‘햅틱-연마 도자기’. 황 교수가 이끌고 있는 서울대 도예학과의 새로운 흐름 중 하나다.

원래 도자기란 물레질한 흙에 유약을 발라 높은 온도의 가마에서 구워내는 것이다. 어떤 도자기가 나올지는 가마에서 나와봐야 안다. 불과 인연이 닿지 않아 터지고 틀어지고 금이 간 그릇들은 불기운이 채 가시기 전에 곧바로 깨진다. 그래서 도자기는 ‘사람의 예술’이 아니라 ‘불의 예술’이라 하고,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한다. 하나 황 교수의 도예에 이르면 얘기가 달라진다. 물레질한 흙에 유약을 바르지 않고도 구워낸다. 그리고 그 거친 표면을 다이아몬드로 연마한다. 이렇게 하면 표면은 차돌같이 단단해지고, 대리석을 만지는 듯한 촉감이 살아난다. 자기의 표면을 ‘불의 선처’에 맡기지 않고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황 교수는 이를 일러 ‘선사시대 토기의 무광택, 1000년이 넘은 청자의 유약, 조선 백자의 단순미에다 21세기 제조기술을 결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주 오랜 세월 쌓여온 자기 기술이 있어요. 그 퇴적된 기술들을 횡적으로 조합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고 했죠.”

도자기를 연마한다는 생소함도, 실은 없던 기술은 아니라고 했다. 원래 도자기의 표면은 유약을 발라 매끄럽지만, 바닥에 닿는 굽엔 유약을 칠하지 않아 거칠다. 이 굽 부분은 나중에 갈아서 부드럽게 만든다. 갈아내면 새로운 촉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물질의 이치. 그래서 시도해 본 것이다. 갈아서 만드는 도자기를. 그리하여 음식이 닿는 안쪽엔 유약을 칠해 매끄럽게 하고, 바깥은 무광택의 토기나 석기의 느낌이 나는 새로운 그릇, ‘햅틱 도자기’가 나온 것이다.

21세기 한국의 미, 세계와 소통해야

황 교수의 도자기를 ‘한국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가 많다. 고유의 전통미를 담은 조선백자의 전통을 잇고 있다는 근거가 희박해 보이는 그의 작품세계 때문이다. 또 ‘황갑순적’이라 할 만한 작품이 완성된 것도 독일에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서구적 현대 도자기의 분파로 해석되기도 한다. 정말 그의 도자기는 서구의 도자기일까?

그는 디자이너들의 잔치인 레드닷 디자인상에서 ‘베스트 오브 베스트’상과 ‘하이퀄리티’상을 잇따라 받았다. 이때마다 따라 나왔던 평가는 높은 수준의 ‘동양미와 서양미의 결합’이었다. 서구인들은 그의 도자기를 단순히 서구의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독일의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문화유목민”이라고 대답한 대목이 있다. “옛날 같았으면 한 지역에 갇혀 그릇을 만들었을 도공이 세계가 교류하는 시대에 태어나다 보니 독일까지 와서 그들의 기술을 배워 양쪽 문화와 기술을 버무려 작품을 만들게 됐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지금 이 시대의 ‘미(美)’는 전통미가 아니라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고 꼽는다.

“이 시대에 가장 한국적인 거요? 한국인이 만든 것, 그리고 세계에서 일류로 인정받는 것이어야만 하죠. 왜냐하면 지금은 글로벌 시대니까요.” 글로벌 시대를 사는 21세기 한국의 미는 한국 땅을 넘어서 세계와 소통해야 한다는 거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그의 도자기를 ‘21세기 대한민국의 전통 도자기’라고 하는 건 무리가 아니다.

뮌헨 국제수공업박람회서 금메달 받은 그의 작품
조각조각 이어 붙여 구운 화병, 이음매 없이 매끈하네요

지난달 독일 뮌헨에서 열렸던 국제수공업박람회에서 혁신조형부문 금메달을 받은 화병시리즈.

원통형 실린더 모양의 화병. 황갑순 서울대 도예과 교수의 작품은 이 화병 하나로 설명된다. 한국의 전통적 곡선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오히려 기하학적 형태가 응용되는 모양새다. 그럼에도 그는 이 화병이 우리의 자기문화 전통을 계승했음을 강조한다.

“공예란 바로 지금의 재료와 기술을 활용해 동시대적 조형미를 실현해내는 것이죠. 조선백자도 만들어진 시기에 따라 가장 적정한 형태로 발전돼 왔고, 나는 이 시대의 정신에 맞게 발전시키고 있어요.”

황 교수는 백자에 파란 선이 들어간 화병 시리즈로 지난달 독일 뮌헨에서 열렸던 국제수공업박람회 혁신조형 부문 분데스 스타츠 프라이스 금메달을 받았다. 독일에서도 혁신으로 꼽히는 그의 디자인은 한국의 자기 정신을 계승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거다. 그의 화병은 실제로 혁신적이다. 그는 똑같이 생긴 실린더형 화병을 수십 개 만들어 놓고, 화병마다 선을 넣고 싶은 대로 몸통을 잘라 안료를 앉히고, 그 위에 다시 화병의 몸체를 앉히는 식으로 작업한다. 파란 선을 그리는 게 아니라 색깔을 잘라서 집어넣는 것이다. 그래도 잘랐던 부분이 터지지 않고, 선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화병이 완성된다. 그리고 표면을 연마해 질감을 살린다. 이 같은 절개 기법으로 크기는 같지만 모양은 모두 다른 화병들이 만들어진다.

“공예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단 한 개의 예술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반복 가능해야 한다는 겁니다. 절개와 연마의 도자기는 언제든 똑같은 크기와 품질로 다시 만들 수 있을 만큼 보편적 기술로 완성한 게 중요한 거죠.”

황 교수의 도자기는 절개와 연마라는 새로운 기법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최고 강점은 바로 ‘유약’이다. 그가 유명해진 것도 실은 능란한 ‘유약의 기술’ 때문이었다. 그는 유약 재료를 수없이 섞어 새로운 유약들을 만들어냈다. 그의 서울대 작업실엔 유약에 들어가는 각종 약품과 재료들을 모아놓은 ‘유약 실험실’이 있다. 또 그의 방엔 그가 만든 유약을 발라 구워본 사기 파편이 가득 담긴 플라스틱 바구니가 줄지어 있다. 그는 “요즘 공장에서 나오는 규격화된 유약을 쓰는 게 도예의 생기를 잃게 한다”고 지적했다. “흙을 바꿀 순 없어요. 하지만 유약을 바꾸면 도자기가 바뀝니다.” 청자의 유약을 만들어냈던 우리 전통 자기의 정신은 그에게서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황갑순 교수는

서울대 공예학과 도자전공을 졸업하고, 독일 킬 무테지우스조형미술대학에서 수학했다. 원래 설치작가로 설치 작품을 만들던 그는 독일의 유명 백자회사인 마이센 국립백자 매뉴팩처의 초빙작가로 활동하며 자기 그릇을 시작했다. 여기에서 그는 공장에서 생산할 수 있는 실용성 있는 자기 디자인을 하게 된다. 이때 디자인한 사발 5개로 레드닷 디자인상에서 베스트 오브 베스트상(2003년)을 받았다. 2년 후엔 하이퀄리티상(2005년)을 받았다. 이 밖에도 미국 함부르크 공예박물관에서 매년 공예작가를 선정해 수상하는 유스투스 브링크만상(2002년)을 비롯해 독일의 문화 공로자에게 수상하는 쿨투어 악투엘상(2003년)을 한국인으로는 윤이상씨에 이어 두 번째로 수상하기도 했다.


국제 공예전이 주목한 ‘황갑순 사단’의 무서운 아이들

황갑순 교수와 제자들이 24일까지 서울 신사동 LVS갤러리에서 열렸던 전시회에서 자기 작품 옆에 서 있다. 앞줄부터 김보경·이예린·황갑순·박미선·이가진·이민수·이인화·박정홍.

‘황갑순의 도자기’에서 21세기 한국 도자기의 가능성을 찾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그의 제자들이 일구고 있는 성취 때문이다. 어떤 분야든 그 시대를 가늠하는 사조가 되려면 추종자들이 하나의 줄기를 형성해 줘야 한다. 그런 점에서 ‘황갑순의 도자기’는 이미 ‘황갑순 사단’이라 할 만한 흐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7년여 동안 그에게서 연마와 유약을 배운 제자들이다. “모든 교육의 중심이 대학이 되었듯이 공예의 창의성도 이젠 공방이 아니라 대학교육에서 나옵니다. 나는 이제부터 오직 학생을 통해 인정받고 싶습니다.” 그의 원대로 그의 제자들은 큰 줄기 안에서 나름의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아직 군데군데 미숙한 부분도 보이지만 성과도 내고 있다. 지난달 독일 뮌헨수공예박람회 기간 중 열렸던 탈렌테(Talente)국제특별전에 5명의 제자가 전시에 참가했으며, 그중 이민수군은 분야와 상관없이 5명에게 수여하는 탈렌테상을 받기도 했다. 이 밖에도 각종 국제 공예전에서 속속 수상하고, 국내 영리 갤러리에서 학생들 초청 전시회를 잇따라 열기도 한다. 대표적인 제자들의 작품세계는 이렇다.

1 박정홍 상감연마자기 곡선미가 살아 있는 백자 화병이나 큰 사발에 상감 기법으로 가는 선을 새겨넣고 구워낸 뒤 연마한 자기를 만들었다. 그의 상감은 매우 가늘고, 섬세하고, 선명하다. 다이아몬드 연마로 처리한 표면은 연마자기의 차돌 같은 느낌과 함께 상감의 선이 그대로 느껴진다.

2 이기욱 조각품 같은 백자 분명 도자기인데 깎아놓은 조각품처럼 보이는 그릇을 만들어냈다. 모서리가 살아있는 기하학적인 형태의 도자기는 독특하고 창의적인 조형미를 보여준다. 그릇의 안쪽엔 유약으로 생기 있는 느낌을 살리고 바깥은 연마했다.

3 이민수 슬립 캐스팅 그릇 단면에서 겹겹의 선이 보인다. 선을 둘러놓은 것이 아니라 백자와 안료를 페스트리 겹처럼 여러 겹으로 겹쳐 만든 독특한 그릇이다. 역시 겉면은 연마했다.


4 이인화 반투명 백자 도자기는 반투명 유리처럼 비친다. 도자기 중간중간에 반투명의 창을 냈다. 중간에 넣은 문양에 따라 흙을 비우고, 겉을 싸서 불투명 백자 사이사이로 안쪽이 보이는 게 특이하다.

5 김보경 백자실린더 다양한 크기의 실린더형 화병을 만들었다. 층층이 쌓아올린 듯한 실린더의 칸마다 색깔의 선을 넣었다. 물레 성형을 하는 과정에서 색깔을 넣어 시간을 줄인 게 특징이다.

6 박미선 꽃잎 모양의 백자 여러 겹의 꽃잎이 겹쳐져 있는 듯한 문양과 촉감을 내는 백자다. 흑물붓기 기법을 통해 꽃잎을 하나하나 만들었다는 것. 그릇 안쪽을 연마하고, 층이 나 있어 실용성엔 의문이 가지만 조형미가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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