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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7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72. 스승을 닮은 제자

성철스님의 은사인 동산스님이 상좌로 절집 생활을 시작한 성철스님에게 한 말이 있다.

"잘 하려고 하면 탈나니 대강대강 사는 것이 대중살이다. "

깨달음을 향한 구도의 열정은 충만하되, 절집의 일상 생활을 꾸려가는 살림살이에는 너무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성철스님이라는 까다로운 큰스님을 모시고 사는 입장에서, 더욱이 백련암 살림을 책임지는 원주 소임을 맡은 입장에선 사소한 살림에도 마음을 놓기 힘들었다.

씨감자는 여러모로 나를 힘들게 한 놈이다. 행자 시절 씨눈을 잘못 따 성철스님께 혼이 난 기억이 생생한데, 원주가 되자 씨로 쓸 좋은 감자를 사는 일이 나를 괴롭혔다. 종자가 좋은 것을 사다 심어야 알도 굵고 생산도 많다.

그런데 평소 다니던 가야장에 나오는 씨감자는 신통치 않았다. 농민들이 좋은 것은 자기들 쓰고 남는 것을 가져다 팔기 때문이다. 물어 물어 알아보니 백련암에서 8㎞쯤 떨어진 마장마을의 씨감자가 좋다고 한다.

마장마을에 부탁해서 씨감자 세 가마니를 구해 놓은 뒤 일꾼 한사람과 함께 리어카를 끌고 갔다. 당시 마을 주민 한사람을 일꾼으로 고용하고 있었다. 갈 때가 오르막이었으니 올 때는 내리막이 되었다. 일꾼이란 사람도 리어카를 끌어본 경험이 별로 없었다.

브레이크 장치라고 해서 바퀴 뒤에 막대기를 꽂고 새끼줄로 단단히 동여매었다. 씨감자 파는 사람이 "이 정도면 될 것" 이라고 하기에 그 말만 믿고 나섰다. 그래도 확실히 한다는 취지에서 브레이크 막대기를 동여맨 새끼줄을 내가 뒤에서 붙잡고 당기며 갔다.

내리막길이 그렇게 무서운 줄 몰랐다. 그럭저럭 내려오다가 갑자기 급경사 비슷한 길이 나타났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일꾼 아저씨한테 한 번 더 "괜찮겠느냐?" 고 물었다.

"지금까지 잘 왔는데 별일 있겠심니꺼?

스님이나 뒤에서 새끼줄을 단단히 잘 잡고 오이소. "

그래서 새끼줄을 단단히 잡기 위해 팔목에 감아 거머쥐었다. 리어카가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뒤에서 새끼줄을 잡고 있는 나도 끌려가기 시작했다. 일꾼 아저씨에게 "리어카 좀 세워봐요" 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리어카는 앞으로 내달리기만 했다.

급한 마음에 쪼그리고 앉아 몸을 뒤로 젖혔다. 리어카가 더 빨라지면서 앞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손에 감은 새끼줄 때문에 질질 끌려갔다.

팔은 끊어지는 것 같고 가슴과 배, 다리까지 온통 길바닥에 내던져지니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손목에 감긴 새끼줄을 나도 모르게 풀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리어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쿵!"

일꾼 아저씨가 튕겨나가며 곤두박질쳤다. 순간 '일꾼 아저씨 죽은 것 아닌가?' 하는 불길한 마음이 솟구쳤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아 한참 길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엉금엉금 기다시피해서 가보니 다행히 리어카는 개울이 흐르는 절벽 쪽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산비탈에 처박히면서 일꾼 아저씨가 튕겨나가 떨어진 것이다. 아저씨는 꼼짝달싹도 못하고 나뒹굴어져 있다. 아무 대책도 없이 앉아 있는데 일꾼 아저씨가 꼼지락꼼지락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 다친 데 없어요?"

대답이 없다. 손목을 내미는데 시퍼렇게 멍이 들어 퉁퉁 부어올랐지만 부러진 것은 아니었다. 상처투성이 둘이 앉아만 있는데 웬 건장한 아저씨가 마장 쪽에서 내려오다가 우리들을 봤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개울 쪽으로 떨어져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 이라며 쏟아진 씨감자를 주워담아 주었다. 그냥 보고만 있으니까 리어카를 동네까지 끌어다 주었다.

흙투성이, 피투성이, 흉칙한 몰골로 백련암에 들어서는데 마침 마당에서 포행(산책)하던 성철스님과 마주쳤다.

"니 꼴이 와 그러노?"

대충 경과를 보고했다. 성철스님이 혀를 차며 듣다가 한마디 던졌다.

"씨감자가 아이라 니가 땅 속에 들어갈 뻔했네. 우쨌든 올해 감자농사는 풍년이겠네. "

위로인지, 흉인지. 확실히 성철스님은 수행이나 계율과 직접 관련되지 않는 살림살이에는 무심한 듯하다.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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