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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극장가 '행방불명' 열풍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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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원령공주' 의 신화가 재연될까. 아니면 '타이타닉' 을 침몰시킬까.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宮崎 駿)의 신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と千尋の神隱し)' 이 일본 열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7월 20일 개봉한 지 불과 한달 반 만에 전국에서 1천3백여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1백75여억엔(1천9백30여억원)의 수익을 내 제작사인 도호(東寶)영화사를 흐뭇하게 하고 있다.

일본 언론은 이대로 나간다면 일본 영화 흥행 순위 1위인 '원령공주' 를 앞지르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전망하고 있다. '원령공주' 는 1997년 개봉된 미야자키의 작품으로, 1천4백30만명이 관람해 총 1백93억엔(2천40여억원)이라는 기록적인 흥행 수익을 올렸다.

한국의 매니어 중에는 이 작품을 보기 위해 도쿄까지 '원정' 간 이들도 있다. 일본에서 개봉했던 영화 흥행 사상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타이타닉' 을 앞지를 지도 초미의 관심사다.

도쿄의 신주쿠.유락조.이케부쿠로 등 주요 극장가에는 여름 내내 35도가 넘는 불볕 더위에도 늘 길다란 줄이 이어졌다. 여름방학을 노린 할리우드의 대작들이 오히려 '행방불명' 된 분위기였다.

작품은 뾰로통하고 왠지 무기력해 보이는 어린 소녀 치히로가 부모와 함께 새로 이사한 집을 찾아가면서 시작된다. 차는 우연히 폐허가 돼버린 테마파크로 들어서는데, 그곳은 밤이면 갖가지 정령과 귀신들의 온천장으로 변하는 곳이다.

부모는 식당에서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던 중 돼지로 변해버린다. 치히로는 부모를 구해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기 위해 온천장에서 힘든 일을 하게 된다. 온천장의 주인인 마녀 유바바는 치히로를 고용하면서 치히로의 이름도 센으로 바꿔버린다. 이때부터 센은 무기력한 소녀에서 혹독한 환경을 꿋꿋하게 헤쳐나가는 모습으로 변모한다.

설정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와 비슷하다. 하지만 치히로가 겪는 마법의 세계가 꿈이 아닌 생생한 현실이라는 점이 다르다. 또 선과 악의 대결이나 영웅의 모험담이 중심을 이루는 디즈니 애니메이션과도 확실하게 선을 긋고 있다. 고비고비마다 그녀를 구해 주는 것은 타고난 순진무구함과 스스로 깨우친 인내심이다.

주인공을 감싸고 있는 배경 화면도 큰 볼거리다. 일본의 전통 온천장 풍경이 화면 가득하게 담긴데다 일본 각지의 전래민화.토속신앙 속의 정령.귀신들이 총출연하고 있다. 하이테크와 공산품에 둘러싸인 현대 어린이들에게 일본 전통의 풍요로움을 맛보게 해주겠다는 미야자키의 '서비스 정신' 에 따른 것이다.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이 흘러가는 장면이나 온천장의 현란한 야경은 붓의 터치만으로는 살려내기 어려운 생동감을 느끼게 해준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미야자키가 처음으로 동화 제작의 일부를 한국 업체인 DR무비에 맡겨 개봉 일자를 맞출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본의 전통색(色)이 강한 작품을 해외 관객들도 볼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원령공주' 를 미국에서 배급했던 디즈니가 최근 이 작품을 미국에서 개봉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제작사인 스튜디오 지브리 측 역시 "아직 해외상영 스케줄은 정해진 바 없다" 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쿄=남윤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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