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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카제→인민군→국군 … 자유의 길은 너무나 멀었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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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호 06면

<1>예비역 공군 소장 윤응렬의 25살 때 모습. 1952년 출격을 마치고 경남 사천기지로 귀환한 뒤 헬멧을 벗고 포즈를 취했다. <2>윤응렬이 1952년 5월 100회 출격을 마치고 돌아와 아내와 함께 F-51 전투기 앞에서 찍은 사진. <3>F-51 무스탕 전투기의 모습. 날개 밑에 폭탄과 로켓 4발이 달려있다. <4>미5공군 사령관 그렌 바커스 중장이 1952년 7월 윤응렬 당시 소위에게 미국 비행수훈십자훈장을 달아준 뒤 악수를 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히라누마(平沼), 소속과 계급은 일본군 오장이었다. 1927년 평양에서 태어난 히라누마 오장은 가미카제 특공대로 출격을 기다리던 1945년 해방을 맞는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1947년 북한 인민군 중위로 변신한다. 공산 정권이 싫어 1948년 38선을 넘어 월남한 그는 대한민국 육군 항공대(공군의 전신)에 들어간다. 그리고 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투기를 몰고 북한과 맞서 싸웠다. 올해 83세의 예비역 공군 소장인 윤응렬. 노병의 삶은 한 편의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일본군→북한군→대한민국 공군으로 살아온 윤응렬옹의 스토리를 중앙SUNDAY가 단독으로 발굴했다.

예비역 공군 소장 윤응렬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

자발적 가미카제 특공대원 거의 없어
평양 제3공립중학교에 다니던 윤응렬은 16세이던 1943년 일본 규슈 비행학교에 들어간다. 일본인 교사 후카미의 체벌을 견디다 못해 일본 유학을 결심한 것이었다. 일본 육군에 끌려가느니 차라리 공군에 들어가는 게 낫다는 생각도 있었다. 윤옹은 “하늘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고 말한다. 일본 규슈 비행학교는 한국인 학생을 잘 받아주지 않았지만 전투기 조종사가 필요했던 일본은 평양 출신의 16세 소년의 입학을 허용한다. 유응렬은 6개월간의 지상 교육과 40시간의 기본 훈련을 마친 뒤 1944년 인도네시아 자바의 일본 공군기지에 배속된다. 소년은 그곳에서 전투 비행훈련을 하면서 출격을 기다렸다. 비행기를 몰고 미국 군함으로 돌진하는 가미카제 특공대의 일원이었다.

“일본 정부는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이 자원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자원자가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은 명령에 의해 자살 특공대가 된 거지요. 미국이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하자 일본이 마지막 발악을 한 겁니다.”

1945년 4월 일본은 공군 조종사들을 인도네시아 자바에 집결시킨다. 그들을 일본 본토로 불러들인 뒤 자살 특공대로 내보낼 셈이었다. 병원선을 가장한 배에 젊은 조종사들을 환자로 위장시켜 태운 뒤 본국으로 송환하려 했지만 정보가 누출되면서 이마저 수포로 돌아간다. 윤응렬은 다시 자바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945년 8월, 윤응렬은 그곳에서 해방을 맞는다.

“나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종전을 반겼어요. ‘아, 이제 살았구나’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종전 이후 10개월 동안 포로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영국군 총사령관에게 진정을 한 끝에 1946년 4월에야 풀려날 수 있었지요.”

윤응렬은 일본 구축함을 타고 베트남 사이공을 거쳐 그해 5월 부산항에 닿는다. “부산항에 내리니 미군이 온몸에 DDT 살충제를 뿌려주더군요. 그리고 한 사람당 1000원씩을 나눠줬습니다. 군대 월급이 70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1000원이면 큰 돈이었죠. ‘미국이 참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윤응렬은 경의선과 연백선 열차를 갈아탄 끝에 황해도 팔학에 도착한 후 걸어서 평양까지 간다. 꿈에 그리던 고향이었다.

음력 4월 그믐날 밤 개펄따라 남으로
고향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부모뿐이었다. 형제들은 이미 공산 정권의 폭정을 견디다 못해 월남한 뒤였다. 그때 일본군 동기생 하나가 그를 찾아왔다. 동기생은 “나랑 함께 가면 비행기를 다시 탈 수 있다”며 북한군 입대를 권했다.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말에 그는 1947년 북한군 공군 장교(중위)에 임용된다. 일본군 비행사 경력을 인정받았은 덕분이었다.

공산 정권의 구호와 선전에 회의적이었던 윤응렬은 안정을 찾지 못했다. “나는 틈날 때마다 ‘김일성은 가짜’라느니 ‘공산당은 마적단’이라고 떠들고 다녔는데 이런 이야기들이 투서를 통해 (북한의) 민족보위부에 들어갔던 모양입니다. 어느새 요주의 인물로 찍혔던 거지요. 어느 날 민족보위부의 사상담당관이 날 부르더군요. 당시 심사과장이 소련군 소속 소좌(소령)였는데 나이가 아버지뻘은 돼 보여요. 나를 척 보더니 ‘동무 앉으라우’ 그래요. 그러더니 ‘지금부터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할 테니까니 모든 걸 사실대로 이야기 하라우’ 그러더군요. 가슴이 철렁했어요. 당시엔 인민 사상을 심사받은 뒤 인민재판에 회부되면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내곤 했거든요.”
윤응렬옹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심사과장이 나를 가련하게 여겼나봐요. 당시 이가 아파서 얼굴이 퉁퉁 부은 상태였는데 심사과장은 나를 인민 재판에 회부하는 대신에 비행기 조종사 자격을 박탈하고 인민군 군복을 벗겼지요.”

그는 북한군 조종사가 된 지 1년 만인 1948년 군복을 벗는다. 그러고는 월남을 결심한다. 평양에서 황해도 해주까지도 움직이기가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는 해주 항공협회에 일을 보러 가는 것처럼 꾸며 월남길에 오른다. 그는 해주에 살던 아버지 친구 ‘최 아저씨’의 집에 일주일 동안 숨어 지내다 음력 4월 그믐, 남쪽으로 향한다.

“월남하는 데는 몇 가지 코스가 있었어요. ‘산을 넘을 것이냐, 개펄을 따라 갈 것이냐’ 선택의 기로에서 나는 개펄을 택했지요. 당시엔 돈을 받고 월남을 도와주는 ‘전문가’들이 있었어요. 어떨 때는 5~10명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한꺼번에 월남하곤 했어요.”

그는 월남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개펄을 따라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안내자가 “이쯤에서 돌아가겠다”고 했다. 더 가면 자신은 돌아갈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윤응렬은 하는 수 없이 혼자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그는 들키지 않기 위해 바닷속에 몸을 숨겼다. 물이 차오르기 시작하자 그는 더 이상 바닷속에 몸을 숨길 수 없었다. 벌떡 일어나서 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 환한 불빛이 보였다. 자유의 불빛이었다. 당시 남한 당국은 월남민들을 위해 환한 전등을 켜놓고 있었다. 사람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자 윤응렬은 크게 외쳤다.

“여기가 이남입니까.”
그러자 어둠 속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환영합니다.”

미군 정보장교 “한문 이름 써봐라”
월남하자마자 그가 처음으로 접촉한 것이 미국 정보기관원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이 정보원은 북한군 조종사 출신인 그를 찾아왔다. 당시 개성 송도중학교에 미국 정보처가 있었는데 이곳 소속 미군 정보장교는 그에게 이것저것을 캐물었다. 윤응렬은 북한군 공군 체제에 대해서 숨김없이 말했다. 그랬더니 미군 정보당국은 당장 그를 기차 일등석에 태워 서울로 데려갔다.

“서울 용산에 미군 7사단 본부가 있었어요. 당시 한국 HID(육군첩보부대) 총책임자로 미스터 위다카란 미국 사람이 있었는데 하루는 나를 부르더니 이름부터 물어봐요. 공산 정권의 테러가 있을까 두려워하던 시절이라 다른 이름을 댔지요. ‘내 이름은 윤광빈입니다.’ 그랬더니 위다카란 양반이 갑자기 한자로 이름을 써보래요. 급한 대로 ‘尹光敏’이라고 썼더니 ‘너, 이름 가짜구나’ 하고는 호통을 치더군요.”

미스터 위다카는 우리말은 물론 한자에도 정통한 사람이었다. 위다카는 윤응렬이 북한이 보낸 스파이가 아닌지 의심한 거였다. 윤응렬은 남한에 사는 지인의 이름을 댄 뒤 그들의 소명 절차를 거쳐 간신히 풀려났다.

서울에 온 윤응렬은 다시 군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는 지인의 도움을 얻어 1948년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다. 대한민국 공군이 없던 시절이었다. 6개월여 만인 1948년 11월 11일 그는 육사 7기로 졸업과 동시에 육군 항공대(공군의 전신)에 배속됐다. 일본군 히라누마 오장이 북한군 중위를 거쳐 이번엔 대한민국 소위로 변신한 것이었다.

6·25 땐 신혼 중에도 전방 폭격 자원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전투기로 여의도와 김포를 공격했다. 대한민국엔 전투기가 한 대도 없었다. 잠자리 비행기로 불리던 L4, L5 훈련기 몇 대가 다였다. 조종사들은 이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미아리, 동두천, 강화도로 연일 출격했다. 국민 성금으로 마련했다 해서 ‘건국기’로 불리는 AT-6 고등연습기가 낙동강 전선을 날아다니기도 했다. 전쟁 통에 잠자리 비행기를 몰던 한국 조종사들의 희생이 속출하자 정부와 미군 당국은 조종사들을 제주에 불러모았다. 그러고는 몇 달 동안 전투 비행훈련을 시켰다. 윤응렬도 거기 있었다. 제주도에서 실전 위주의 훈련을 받은 그는 1951년 10월 11일 적진인 황해도 해주를 향해 처음으로 출격했다. 제3편대 2번기가 그가 탄 비행기였다.

“첫 출격이었는데 적진을 폭격하고도 로켓 두 발이 남았더라고요. 공명심에 그랬는지 편대를 이탈해서 공격 목표를 향해 나머지 두 발을 더 퍼부었지요. 목표물을 정확하게 명중시켰는데 귓전에서 ‘나이스 슈팅’ 하는 말소리가 들려요. 어찌됐든 목표를 완수한 뒤 급하게 편대를 따라붙어 경남 사천 비행장에 내렸지요. 내리자마자 기합을 받은 건 당연했지요.”

그해 12월 19일, 그는 처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금의 부인과 결혼한다. 처가에서 결혼을 반대했던 건 그가 최전방과 적진을 날아다니는 전투기 조종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경남 사천 비행장 주변의 단칸방에 살림을 차렸다. 신혼여행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일주일여간의 달콤한 신혼 생활을 뒤로 하고 그는 강릉 비행장으로 복귀했다. 결혼한 조종사는 6개월간 일선에 배치하지 않는 게 관례였지만 그는 자진해서 전방에 나갔다. 이듬해인 1952년 1월 15일, 그는 대한민국 공군사에 길이 남을 만한 업적을 이뤄낸다. 평양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승호리 철교는 북한군이 만주에서 황해도 중부전선으로 전쟁 물자를 실어 나르던 요충지였다. 미군이 500여 차례에 걸쳐 폭파를 시도했지만 지형이 까다로워 번번이 실패하곤 했던 쉽지 않은 임무였다. 윤응렬은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에 편대장으로 참가했다. 평양 출신이라 이 지역 지형을 잘 안다는 점도 이점으로 작용했다.

“당시 강릉기지 사령관이었던 김신 장군이 ‘한국 공군의 명예를 빛내라’며 미군이 좋아하던 캐나디안 위스키 한 병을 부상으로 내걸었습니다. 위스키 한 병에 목숨을 걸었던 셈인데 막중한 책임을 느끼며 F-51 전투기를 몰고 출격했어요. F-51은 8500피트로 날아가다가 최소한 3000피트 부근에서 폭탄을 던진 뒤 급상승해야 하는 게 상식입니다. 그런데 거리가 멀면 정확도가 떨어지잖아요. 나는 6500피트로 날아가다 1500피트 부근에서 폭탄을 투하한 뒤 하늘로 올라갔지요.”

당시 폭파 작전에 나섰던 비행기는 모두 6대. 전투기를 몰던 이는 모두 윤응렬의 동기생(일본 비행학교)들이었다. 윤응렬을 제외한 나머지 5명은 전부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다. 폭파 작전을 완수하자마자 미 공군 비행기가 확인차 현장에 출격했다. 미 공군은 끊긴 다리 사진을 대한민국 공군에 보내왔고, 윤응렬 일행은 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대가로 공군참모총장 표창을 받았다.

미셸 위 할아버지와도 함께 출격
윤응렬은 1953년 3월 26일에도 동료들과 함께 출격한다. 전략적 요충지인 강원도 고성 351고지를 사수하기 위한 연합 작전이었다. 북한의 공격을 막기 위해 대한민국 육군과 공군, 미 공군과 미 해군이 함께 나선 사상 초유의 협동 작전이었다. 미 해군이 바다에서 함포로 먼저 공격하면 육군이 대포로 지원 사격을 한 뒤 공군이 출격하는 순서였다. 윤응렬은 이때도 F-51을 몰고 편대군장의 중책을 맡아 출격했다. 미셸 위의 할아버지 위상규옹도 그와 함께 출격했다. 당시 윤응렬은 소령, 미셸 위의 할아버지는 대위였다. 고 위상규옹은 우리나라 최초의 항공공학 박사로 2008년 82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미셸 위의 할아버지는 참 용감한 군인이었지요.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해서 별명이 불사조였어요. 나와 위 박사는 뜻이 잘 맞는 전우였지요. 만약 그 당시 작전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지금 설악산은 북한 땅으로 남아 있었을지도 몰라요. 돌아가시기 전 내게 전화를 걸어와 ‘미셸 위가 바로 내 손녀’라고 자랑을 하곤 했는데 먼저 가다니 무척 안타까워요.”

윤응렬옹은 지난 3월 26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라코스타 골프장을 직접 찾아가 미셸 위를 만났다. LPGA투어 KIA클래식 개막에 앞서 이 대회에 출전한 미셸 위에게 당시의 전투 상황이 담긴 그림과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직접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이날은 윤응렬이 351고지 작전을 수행한 지 정확히 57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윤응렬 옹은 1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미셸 위에게 위상규 옹과 함께 찍은 사진과 당시 상황을 그대로 묘사한 그림을 전달했다.

“내가 죽기 전에 미셸양에게 꼭 이 사진과 그림을 전해주고 싶었어요. 할아버지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었으니 미셸양도 열심히 운동을 하라고 격려하고 싶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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