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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쓴맛 아는 곰삭은 중견 화가들의 절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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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산과 계곡의 기를 탕탕 튕기듯 마음으로 받아친 한정욱씨의 손가락 그림 ‘느림’. 관객들도 그 활달한 에너지에 쉽게 감전된다. 캔버스에 아크릴릭, 145.5X97㎝, 2010. [팔레 드 서울 제공]

풋풋한 젊음이 좋다지만 곰삭은 늙음이 더 아름다울 때도 있다. 미술시장에서 한동안 뒷방 신세를 지던 중견들이 대거 귀환했다. 기차가 굴을 지난다고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누가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그들은 열심히 그린다, 살아있기에-.

‘지독한 그리기’. 서울 신문로 성곡미술관에서 열리는 김동유(45)씨 개인전 제목이다. 말마따나 지독하다. 손톱만한 인물상을 점처럼 그려서 집 채 같은 초상화 한 점을 완성하는데 하루 18시간씩 두 달이 걸린다. 28일까지, 02-737-7650.

한정욱(49)씨 작품전에 가면 3개 층 벽면을 채운 작업량에 질리게 된다. 서울 통의동 팔레 드 서울은 웬만한 아트 페어가 가능한 광활한 공간인데 한씨는 이곳에 수십 점을 걸고도 작업실에 못 보여준 근작이 남아있다고 한숨이다. “푸른 기운을 뿌려서 나를 치료하고 영혼을 수술한다”는 작가 노트 그대로다. 손가락으로 순식간에 물감을 짓이겨 토해낸 계곡과 산의 풍광이 보는 이 마음에 기(氣)로 쏟아진다. 30일까지, 02-730-7707.

애잔한 슬픔이 묻어나는 문봉선(49)씨의 36m 대작 ‘대지’는 임진강을 사생했으나 실은 역사 얘기다. 서울 사간동 금호미술관 2층 벽면을 빙 두른 작품 앞에 서면 분단 60년의 무게가 까칠한 먹빛으로 되살아온다. 화장한 뼈를 강에 뿌리던 실향민의 아픔이 담담한 수묵화로 부활했다. 25일까지, 02-720-5114.

김홍주(65)씨 작품은 다시금 ‘그림이란 평면을 물감으로 덮은 것’이란 회화의 오래된 정의를 되새기게 한다. 꽃잎, 밭, 산, 섬…무엇이라도 좋다.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 들어서면 오로지 붓 하나로 세상의 모세혈관에 접속한 흡혈귀를 만나게 된다. 30일까지, 02-733-8449.

난만한 해학의 노신사들도 4월 화랑가를 누빈다. 1990년대 일찌감치 제주도로 낙향해 태풍과 골프라는 극과 극의 호사를 누리며 사는 이왈종(65)씨는 ‘제주생활의 중도(中道)’란 제목으로 보기만 해도 즐거운 그림을 내놓았다. 부조, 목조, 도자 등 다양한 재료로 변주한 근작 중에서는 원초적 성생활을 주제로 한 향로가 눈길을 끈다. 27일까지, 서울 관훈동 노화랑, 02-732-3558.

남도 화단의 맏형님으로 꼽히는 황영성(69)씨는 1970년대부터 40여 년에 걸친 작품 세계를 한자리에 풀어놓았다. 가족과 고향에 집중해온 작가는 이제 전 지구적인 차원의 인류애를 화면에 품고 있다. 5월 2일까지 서울 신사동 갤러리 현대, 02-519-0800.

작고화가 손상기(1949~88)의 ‘시들지 않는 꽃’전은 제목 그대로 ‘한국 현대 화단의 로트렉’으로 불리는 신화를 확인하게 만든다. KBS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의 배경으로 등장해 시청자의 궁금증을 자아낸 손상기의 그림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다. 장애인의 아픔을 딛고 변두리 삶의 절실함을 ‘공작도시’ 연작으로 토해낸 그 집념이 작고 20여 년이 흘렀어도 뜨겁다. 5월 30일까지 서울 청담동 샘터화랑, 02-514-5122.

정재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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