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노트] 학문 체계 미약한 국내 예술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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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최근에 나온 박용구(88)씨의 증언집 『20세기 예술의 세계』는 우리 현대예술에 관한 중요한 구술사 책이다. 연극.무용.음악.건축.영화 등에 관한 박씨의 전방위적 관심사가 녹아있다. 중요한 사건과 일화에 대한 증언 가운데는 학문 연구자들이 인용할 수 있는 것들도 많았다.

그런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뭔가 아쉬운 부분이 있다. 구술사가 잘못이라는 게 아니라, 국내의 예술사 연구가 구술사 수준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연구자의 태부족이 문제지만, 설령 선행 연구가 있다하더라도 학문적 체계가 미약한 그 '수준' 도 문제다.

서양의 세례를 받은 한국의 현대 연극이나 영화, 음악의 역사는 대략 1백년이 넘는다.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개화기를 그 시점으로 보면 무난하다. 현대무용도 최승희를 기점으로 한다면 70년이 넘는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분야별로 제대로 된 예술사는 전무한 실정이다.

영화에서는 조희문(상명대) 교수가 실증적인 학문연구를 처음으로 시작했다. 조교수는 '한국(제작)영화' 의 본격 시작을 1923년작인 '국경' 이라고 박사논문서 주장하는 등 이 분야 연구를 선도하고 있다. 그동안 이영일.안종화씨 등이 '한국영화사' 관련서를 냈으나, 앞서 지적한 구술사나 기억에 의존한 기록들이어서 같은 사안에 대한 엇갈린 주장이 많다. 음악.무용사의 수준도 그 정도다.

다른 장르에 비해 비교적 연구가 활발했던 곳은 연극사다. 유민영(단국대) 교수가 일찍이 연구를 시작해 업적을 쌓았다. 최근엔 『한국연극운동사』라는 두툼한 책을 냈다. 그러나 이 책도 결점이 적잖다. 엄청난 자료 축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석이나 각주.인용에 대한 전거(典據) 등을 충실히 밝히지 않아 선구적 업적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긴 힘들다.

선구적 시도의 완성도가 떨어지면 결국 그 뒤를 따르는 후학들의 어려움이 커진다. 일일이 전거를 다시 찾아 확인해야 하기 때문. 구술사가 가치가 있으면서도 '기억을 더듬는' 행위 이상이 아니어서, 그것을 인용할 경우 전거를 다시 확인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현장의 발전만으로 예술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를 제대로 기록하는 학문의 깊이도 따라야 한다.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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