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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의 울퉁불퉁 일본문화] 5. 열린 일본 닫힌 일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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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 "같이 가자". 2002년 한일 월드컵 예선전에서 일본의 젊은이들이 양국 우호의 우리말 메시지를 깜찍하게 선보였다. 이제 우리가 가슴을 열 때다. [중앙포토]

내년 한.일수교 40년을 눈앞에 두고 누구네의 문이 활짝 열렸고 어떤 문은 꽁꽁 닫혔는가를 점검하는 건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나는 아사히 신문의 마키노 요시히로라는 정치부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내가 먼저 "가수 생활 35년 만에 외국신문 정치부 기자와 마주앉기는 처음"이라고 운을 떼자 그가 대뜸 흥미로운 질문부터 던져왔다. "한국의 과거사 청산 작업은 우리 일본까지도 적잖게 긴장시키고 있다. 당신 견해는 무엇인가?" 나는 숨도 안 쉬고 내 의견을 밝혔다. "그것이 국론이면 찬성, 한갓 당론 차원이라면 불찬성이다"고.

즉 지금의 분단 상태에서 어느 한쪽만의 과거사 청산은 왠지 불완전해 보인다고 대꾸를 한 것이다. 질문은 더 이어졌다. "왜 어느 날 갑자기 친일파를 자청했느냐." 그 기자는 2002년 월드컵 때 내가 중앙일보에 쓴 칼럼을 읽은 모양이었다. 대답 못할 것도 없었다. "나는 해방 이후에 태어나 반북(북한), 반공(중국), 반소(구소련), 반일(일본)로 일관해왔다. 그건 숙명이었다. 분위기가 그러했다. 철이 조금 든 지금 들어 이제 통념과는 또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게 내 대답이었다.

사실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라는 단행본은 이런 반일감정을 재확인시켜줬다. 또 일본을 아예 무시해 버릴 수 있는 근거로 자리잡았다. 두 책은 한국인이 일본을 이해하는 대중적 코드인 것이다. 그러다가 나는 2002년 취재 차 도쿄로 건너가 모리 빌딩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며 "어, 일본이 있네", 도쿄~오사카 신칸센을 타고 창밖을 보며 "어! 일본이 엄청나네" 를 내뱉어야 했다. 전여옥의 책 제목만 맹신했던 불찰을 탓해야 했다. 독자적인 일본론을 담은 '축소지향의 일본인' 역시 함정일 수 있었다. '일본=축소지향의 나라'분석은 반대급부도 컸다.

가령 그는 한국과 일본의 밥문화를 비교해가며 한국은 그릇에 밥을 담아 바닥에 놓고 먹지만 일본은 밥을 공기에 담아 들고 먹기 때문에 축소지향형이라고 했다. 도시락(벤토) 문화나 트랜지스터 문화도 축소지향의 결정체라고 못 박았다. 거기까지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어령 선생님은 도시락과 트랜지스터가 장소에 제한없이 먹고 즐길 수 있다는 명백한 '확대지향'의 현상은 고려하지 않았다. 무릇 세상은 양 측면이 있는데도. 즉 아무리 약한 피아노 소리에도 포르테(f).피아노(p)가 혼합되어 있듯이 말이다.

내가 이토록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는 두 권의 책이 적어도 나 같은 사람한테는 일본을 턱없이 왜소하게 보도록 부추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라. 어쨌거나 세월은 약이다. 일본이 있건 없건, 또 축소지향형이건 확대지향형이건, 아니면 일개 가수인 내가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가 큰 소리를 치건 말건, 이번 시리즈를 관심있게 읽어준 내 주변의 반응은 그저 여유있고 덤덤한 쪽이다. 흥미로운 제안이라는 말도 꽤 들었다. 어느새 우리도 컸다는 얘기다. 그 바람에 나는 겨우 살아났다.

"자칫 이 시리즈가 문제가 되면, 일본에 정치적 망명을 할 수밖에 없다"고 주변에 잔뜩 엄살을 부렸지만, 이제 그럴 필요는 없게 됐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자 결론을 짓자. 짐짓 이어령은 일본의 문이 닫혔다고, 전여옥은 문을 열 필요조차 없다고 조언했지만 내가 본 일본의 문을 일찍부터 열려 있었다. 문제는 우리 쪽 문이다. 이렇게 묻고 싶다. "혹시 우리는 일본의 열린 문을 외면한 채 우리 쪽 문만 꽁꽁 걸어잠가온 것이 아닌가?" 대세의 물결에 영화 쪽 문만 빠끔히 열어놓고 지켜봐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일본영화는 한국 땅에서 힘을 못쓰고 있다.

이제 남은 건 일본 가요와 음반 쪽의 문이다. 한국 가요판에 몸담고 있는 나는 낙관을 한다. 일본음악은 오래 전에 개방된 미국음악이 차지한 정도의 지분을 결코 뛰어넘지 못한다. 그건 다른 예술 분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들은 백남준 같은 '특급제품'을 못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예술에서는 독(毒)일 수 있는 그네들의 선천적인 정갈함 때문이다. 또 우리 한국인의 타고난 자유분방함 그리고 에너지 때문일 것이다.

자, 정말 세월은 좋아졌다. 나 같은 자칭 친일파가 예전처럼 부역(附逆)혐의를 받지않는다는 점만 봐도 과연 21세기는 21세기다. 외려 일부 너그러운 분들이 나같은 가수를 한.일 양국 친선의 메신저 취급을 해주는 것이 눈물 날 정도로 다행스럽고 고맙다. 기회에 주제넘은 한마디를 더하자면, 그 흔한 '동북아의 허브' 얘기 등등을 굳이 하려걸랑은 먼저 우리의 가슴부터 열어놓자는 제안을 던진다. 물론 우리의 자신감을 토대로 말이다.

조영남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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