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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으로 남은 30년 전 ‘필화 경험’, 신앙의 힘이 그 분노 잠재울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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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소설가 한수산씨의 새 장편 『 용서를 위하여』는 신앙을 통한 용서에 대한 이야기다. [해냄 제공]

소설가 한수산(64)씨가 1981년 본지 연재소설 ‘욕망의 거리’로 인해 겪었던 ‘필화(筆禍) 경험’을 상세하게 밝혔다. 한씨 본인이 실명으로 등장하는 장편소설 『용서를 위하여』(해냄)를 통해서다. 한씨 필화사건은 소설이 국가원수를 모독하고 군(軍)을 비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서 한씨는 물론 당시 본지 정규웅 문화부장 등 관계자들이 보안사로 끌려가 며칠씩 고문당한 사건이다. 당시 함께 끌려가 고문당한 박정만 시인은 끝내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88년 세상을 떠났다. 20일 한씨는 “지금까지 고문 경험에 대해 짧은 글을 쓴 적은 있지만 무엇이 끝내 상처로 남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 자세하게 쓴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한씨는 전체 16개 장(章) 중 6·7장 70여 쪽을 고문 경험에 할애하고 있다. 연재소설 집필 차 내려가 있던 제주도에서의 압송 장면부터 어둠 속의 구타, 물고문·전기고문 등 인간이기를 포기하도록 강요당하는 끔찍한 상황 등이 실감나게 그려진다. 80년 언론통폐합에 따른 TBC(동양방송) 포기에 반감을 품은 삼성 이병철 회장이 관계사인 중앙일보를 이용해 반체제적인 글을 쓰도록 돈을 주고 한씨를 사주한 사실을 자백하라고 다그치는 장면도 나온다.

저항의지가 꺾인 한씨가 기관원들이 원하는 대로 허위 진술하는 장면. 조서(調書) 문건 상의 최초 ‘국가원수의 대머리’란 표현이 ‘국가원수의 희소한 모발로 인한 헤어스타일’에서 ‘국가원수의 헤어스타일’ 등으로 기관원에 의해 차츰 완화되는 장면은 차라리 한 편의 코미디다. 한씨는 “무엇보다 담배 피우고 차 마시듯 사람을 달아매고 두드려 패는 폭력의 일상성이 나같이 심약한 사람에게는 더 큰 절망감을 안겨줬다”고 말했다.

소설은 상처의 복기(復棋)만은 아니다. 끔찍한 고문의 가해자들을 과연 용서할 수 있는가. 한 걸음 더 나가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를 물고 늘어진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신앙과 삶을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서다. 추기경이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는 영적 형성기, 독일 유학시기까지를 현장 답사를 통해 촘촘하게 따라간다. 결국 ‘신앙의 힘을 통해 과연 인간적 상처와 분노를 잠재울 수 있는지’가 소설의 중심 테마다. 한씨는 “추기경이 나처럼 엉겁결에 고초를 겪고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소설을 쓰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소설의 결론은 이런 것이다. ‘가해자가 사죄하지 않더라도,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용서하자.’ 신앙의 절반승이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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