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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동북아 3국의 남미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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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노무현 대통령이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와 남미 주요국 순방을 위해 출국했다. 중국의 후진타오 국가주석도 비슷한 일정으로 남미로 떠났다. 지난 100년 이상 이 지역에서 동양국가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깊은 경제적.인종적 유대를 가졌던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도 역시 이 기간 남미를 순방한다.

아마도 동양 3국의 정상들이 같은 기간 남미에서 활발한 정상외교를 벌이는 것은 역사상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그만큼 남미는 그동안 유럽과 미국의 무대였다.

그런 점에서 이번 APEC 기간에 한.중.일 3국이 남미에서 세계의 주요 현안과 지역문제, 그리고 경제이슈를 논의하는 집중적 기회를 잡은 것은 동북아의 3국도 이제 남미 지역국가는 아니지만 경제.정치적으로는 남미지역에 기능적으로 연관, 결합돼 활동을 한다는 의미다.

최근 몇 년간 중국의 비약적 경제성장은 동북아 지역에서만이 아니라 남미의 경제협력 패턴도 바꿔놓았다. 브라질 등 남미 지도자들은 이제 자국 농산물과 물품들의 주요 시장인 중국과의 협력강화에 부심하고 있다. 중국의 급격한 부상은 남미 좌파정권의 잇따른 집권과 새로운 '표준의 제정'움직임 등과 맞물려 미국과 일본의 조바심을 초래하고 있다. 여기에다 한국도 남미국가들과 최근 협력의 질과 규모를 급격히 넓히고 있다.

이처럼 한.중.일 3국은 동북아라는 지역적 한계를 넘어 이미 남미에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3국이 동북아의 지역현안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상호 협의해야할 현안과 공동의 이익증진 분야가 많고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한.중.일 3국 정상이 남미에서 다룰 논제는 북한 핵문제를 비롯해 에너지와 자원협력, 자유무역협정(FTA) 문제 등 다양하다.

이 때문에 동양 3국 정상이 부시 재선 후 미국의 안마당이라는 남미에서 다자간 협력의 틀 속에서 다양한 형태의 정상회담을 열고 세계의 이슈와 동북아의 현안을 논의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그동안 동북아의 이슈에 역외 세력이면서도 기능적으로 동북아 국가처럼 반응하고 대응했던 미국과 유럽의 입장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한.중.일 3국은 역내 문제에 대해 공동의 보조나 공동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데 주저하는가. 과거엔 냉전의 이유가 컸다. 한.미 동맹과 미.일 동맹은 냉전기 중국과 소련에 맞서는 핵심적 안보구조였다. 냉전 후엔 중국과 일본의 라이벌 의식에다 일본의 과거사 왜곡과 제국주의적 침탈에 대한 반성 미비, 북한 문제의 존재 때문에 3국 관계가 '협력의 화음'보다는 '대립과 갈등의 불협화음'의 모습으로 강조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지역은 안보와 같은 경성 이슈를 제외한다면 전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경제가 발달하고 상호교류와 투자가 증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재 유럽과 미주는 하나의 큰 틀의 공동체 모습을 그려가고 있다. 그런데도 한.중.일 3국이 지역현안을 역외세력과의 사전 협의 후에나 대화를 진행하는 방식을 택하는 것은 여전히 냉전적 잔재와 사고에 이 지역 정치인들과 외교관들이 갇혀있다는 방증이다.

동북아 지역은 인구나 기술력, 자본 등에 있어 유럽연합이나 미주연합 등과 비교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여기다 과거의 역사나 문화의 힘, 도덕적 가치, 종교적 다원성과 관용 등에 있어서도 서구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한.중.일 3국 정상이 APEC에서 각자 개별적 역량의 극대화나 개별적 성과의 경쟁을 하는 것도 좋지만 동북아 역내의 흐름을 탈냉전에 맞게 조율해야 한다. 그래서 향후 큰 틀의 동북아 협력체가 이 지역에서 탄생할 수 있도록 한.중.일 3국 정상회담의 정례화나 3국 간 협의체를 창설해 밑그림을 그리자는 공감대를 형성하길 기대한다.

김석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