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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시인들 시 모음집 '남자들은 모른다' 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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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이 가죽 트렁크//이렇게 질겨빠진, 이렇게 팅팅 불은, 이렇게 무거운//지퍼를 열면/몸뚱어리 전체가 아가리가 되어 벌어지는//수취거부로/반송되어져 온//토막난 추억이 비닐에 싸인 채 쑤셔박혀 있는, 이렇게//코를 찌르는, 이렇게/엽기적인"

부드럽고 너그럽고 풍성하여 아름답던 '여성적 시' 에 비해 '여성주의적 시' 들은 왜 이토록 엽기적이어야 하는가. 김언희씨의 위 시 '트렁크' 에서 여성, 여성의 가장 은밀한 부분의 상징으로도 읽힐 수 있는 트렁크에는 불모의 비닐에 싸인채 토막난 추억만 악취를 풍기며 쑤셔박혀 있어야 하는가.

김승희(서강대 국문과 교수)시인이 최근 『남자들은 모른다』(마음산책.6천8백원)를 펴냈다.

이 책에는 국내외 여성 시인 30명의 여성주의적 시 44편이 김씨의 해설과 함께 실려 있어 여성들의 무엇을 위해, 왜 그런 시들이 광기와 위악의 엽기로 흐르고 있는지 남자들도 알 수 있게 한다.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중략)//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 (최승자 '일찌기 나는' 중)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은 곰팡이나 오줌 자국 같은 비천한 존재다. 그래서 역사나 진실이 될 수 없고 '여성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는 최씨의 시구는 여성의 자기 정체성을 찾는 선언으로도 들린다.

"무릇 남자의 성기 밑에/여자의 자궁을 예속시키자는/영원무궁한 음모이외다/그러므로 정실부인의 반열에 든 여자들은/여자가 여자 자신의 적이다, 이 말을/거의 선진적으로 깨우쳐/스스로 만든 장벽을 넘어가지 않는다면" (고정희 '사임당이 허난설헌에게' 중)

고정희는 여성신화의 상징인 신사임당, 그 정실부인과 현모양처가 곧 남성중심 이데올로기가 지어낸 허상이라고 폭로한다. 그러면서 남성의 식민지인 여성을 구하기 위해 70년대부터 선진적으로 '여성해방출사표' 를 쓴 시인이다.

이때부터 가부장적 질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여성적 시와 함께 거기에 반발하며 주체로서의 여성을 찾으려는 여성주의적 시가 한국에서도 쓰여지기 시작했다고 김승희씨는 말한다.

루머에 지나지 않았던, 아무 것도 아니었던 여성이었음을 고통스럽지만 뚜렷하게 확인하고 당당히 주체로 서기 위한 몸부림이 여성주의적 시와 시인을 자기분열적인 광기, 나아가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고 있는 것으로 김씨는 보았다.

그러나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대항이 여성문학의 궁극의 목표일 수 없다는 김씨는 남성.여성 두 성 다 자유스럽게 잘 살 수 있기 위한 포스트 페미니즘적 사회가 오기를 소망했다. 그때 여성시들은 진정한 여성다움을 드러낼 것이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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