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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섬 '아리랑제' 현장을 가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부산에서 49.5㎞ 떨어진 일본 쓰시마(對馬)섬. 씨플라워는 1시간만에 북쪽섬의 관문 히타카츠(比田勝)에 정박했다. 섬의 80%가 원시림에 뒤덮여 울릉도 같은 지세다.

자동차로 다시 쓰시마의 중심지 남쪽섬 이즈하라(嚴原)로 갔다. 남북 82㎞를 2시간에 종단하는 험준한 산길이다. 인구 1만6천의 읍내엔 아리랑제를 알리는 깃발이 곳곳에 내걸렸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조선통신사의 발자취. 쓰시마 사람들이 조선통신사를 맞았던 곳에는 예외없이 표석이 세워지고, 읍내를 가로지르는 이즈하라천을 따라 조선통신사 행렬도 그려져 있다.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2백년간(1607~1811) 12회에 걸쳐 쓰시마로 들어와 에도(江戶, 도쿄)까지 갔다.

이즈하라의 후치가미 정장(町長)을 만났다. 그는 "역사교과서 문제가 불거져 유감" 이라며 "우리는 부산과의 교류를 중시한다" 고 말했다.

조선통신사비와 고려문을 지나 쓰시마역사관을 찾았다. 역사관에는 쓰시마를 다스린 대마도주의 계보도가 있었다. '대마도도 한국땅' 이란 책을 쓴 고성동중 김화홍

(http://www.daema.pe.kr)교장이 "쓰시마를 잘 보라" 고 당부하던 말이 생각났다.

강 건너편 산 아래 슈젠지(修善寺)엔 구한말 유학자이자 항일에 앞장섰던 최익현(崔益鉉)선생의 순국비가 세워져 있었다. 전해 오기로 백제의 비구니가 창건했다는 절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장례를 치른 뒤 부산항으로 유해가 이송됐다.

4, 5일 부두에선 아리랑제가 열렸다. 김덕수 사물놀이패 등 한국에서도 많이 참여했다. 4일 시가지엔 미코시 행렬이 재현됐다. 초등생에서부터 할머니.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주민들 모두가 30도를 웃도는 더위도 잊은 채 흥겨운 표정이었다.

그들의 외침은 "왔소!" 로 들렸다. 조선통신사가 왔다는 뜻일까.

쓰시마는 일본땅 어느 곳보다 우리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이즈하라=송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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