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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축제가 되는 사람, 엘비스여 영원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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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호 08면

1 엘비스 프레슬리의 첫 직업은 트럭 운전수였다. 그는 1953년 고교를 졸업하고 크라운 전자회사에서 트럭을 몰았다. 그것과 같은 모델인 시보레 31 아파치. 이종진 관장은 엘비스의 장례 행렬에 참여했던 흰색 엘도라도 캐딜락 등 엘비스와 관련된 자동차를 6대 보유하고 있다. 이 관장은 자동차를 실내에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기념관을 이전할 계획이다.

언젠가 한 퀴즈 프로그램에 이런 문제가 나왔다. ‘다음 중 한국에 기념관이 있는 인물은?’ 모차르트·베토벤·아인슈타인·엘비스 프레슬리. 답은 엘비스 프레슬리다. 경기도 파주에 가면 엘비스기념관(www.elvishall.com)이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 한국 팬클럽 회장인 이종진씨가 사재를 털어 10년 전 문을 열었다. 그곳에 가봤다는 엘비스 팬클럽 회원의 블로그 글이 인터넷에 있는가 하면, 문이 닫혀 헛걸음했다는 경험담도 떠돈다. 이 관장이 주 중엔 본업(인쇄업)에 종사하고, 주말에만 기념관 문을 여는 탓이다. 주 중엔 전화도 받지 않는 박물관인데, 정문에는 ‘예약한 관람객만 입장할 수 있다’고 써놨다.

이경희 기자의 수집가 이야기 - 엘비스기념관 이종진 관장

운이 좋아 기념관에 들어가선 엘비스 DVD를 두 시간은 볼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럴 자신이 없다는 사람은 아예 입장시키지 않는다. 취재를 빌미로 찾아가서도 꼼짝없이 1970년 8월 라스베이거스 서머 페스티벌 공연을 담은 다큐멘터리 DVD, 엘비스 25주기 기념 유럽 순회 공연 DVD를 연이어 감상해야 했다. 다행히 행복한 고문이었다. 전성기의 엘비스는 시공을 뛰어넘어 빛을 발했다.

지켜보는 내내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엘비스와 함께 무대에 올랐던 팀들이 호호 할머니, 파파 할아버지가 돼 엘비스 영상을 크게 띄워놓고 공연하는 모습도 이채로웠다. ‘엘비스는 영원하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 엘비스의 목소리와 모습을 완벽히 구현하기 위해 공들여 갖춘 오디오·DVD 시스템도 하나 하나가 보물급이었다. 그리 친절한 기념관은 아니지만, 엘비스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더 없는 행복을 안겨주는 곳.

2 엘비스 프레슬리가 생전에 발표한 LP 72장을 모아 케이스만 기념관 벽에 진열해놨다. 3 엘비스 밀랍인형. 기념관 구석에 자리 잡은 이 인형 외에도 크고 작은 엘비스 모형이 있다.

“애초에 상징적인 의미로 지은 거지, 시끌벅적한 관광지가 되길 원하진 않았어. 커피도 안 팔고 술도 안 팔아. 유흥이 되면 기념관의 의미가 퇴색하니까. 미국이나 일본에서 엘비스 팬들이 기념품이나 팔겠거니 하고 찾아왔다가 이런 데는 처음 본다며 눈물을 흘리더라고. 아파트 두 채 팔아먹고, 행사 한 번 하면 3000만~4000만원은 날리지만 여태 손 한번 벌려본 일 없어. 올해 기념관 설립 10주년, 팬클럽 결성한 지도 40년 가까이 됐는데 전 세계에 이런 일이 없는 거지.”

“엘비스 이전에도 대중음악은 있었지. 그러나 남녀노소 빈부격차에 따라 듣는 목적과 장소가 달랐지. 엘비스는 우리 모두의 음악으로 군림했어. 그런데 엘비스가 얼마나 겸손했느냐? 스물한 살 때 기자가 물었어. 어떻게 당신만 나오면 무대를 열정의 도가니로 만드느냐고, 그 능력이 어디서 나오느냐고. 엘비스는 ‘여러분도 할 수 있는 겁니다. 저는 운이 좋아 하나님께 먼저 선택받은 거죠’라고 했지. 그 얘기를 듣고 우리는 다 할 수 있었던 거야. 비틀스, 롤링 스톤스, 하다 못해 밥 딜런도 엘비스 때문에 가수가 됐어. 9년 전인가 밥 딜런이 죽을 뻔했을 때 ‘이제 엘비스 만나러 간다’고 했잖아. 엘비스를 알든 모르든, 좋아하든 싫어하든 이 사람 문화 속에 살고 있는 거야.”

“그런데 엘비스가 궁둥이나 흔들고 다리나 흔들다가 10대, 20대 여자들이 뽕 가서 스타덤에 올라간 것처럼 취급하는 자체가 문화 인식이 아직 멀었다는 거야. 미국의 대표 가수? 그럼 미쳤다고 여기 기념관을 만들었겠어? 엘비스는 세계 최고야. 전무후무지. 글 좀 안다는 사람들이 로큰롤이 어떻고 트로트가 어떻고 재즈는 어떻고 하면서 구분을 주는데, 클래식이든 뭐든 판 벌였을 때 손님 안 오면 끝나는 거야. 모든 게 다 대중적이어야 한다고. 엘비스 이후의 음악이란, 엘비스가 한 음악을 우려먹고 재탕하고 선지 넣고 다시 끓여먹고 하는 거라고. 누굴 폄하하려는 게 아니라, 사실을 알자는 거지.”

“난 1년에 두 번 음식을 제공해. 1월 8일 엘비스 탄생 주간, 8월 16일 추모 주간엔 엘비스가 생전에 먹던 스테이크와 빵을 내놓지. 엘비스는 담배도 못하고 술도 못 마셨어. 하지만 죽어서도 기쁨을 주니 이날 만큼은 맥주와 소주를 제공하지. 내가 술 마시기 대회에서 몇 번이나 1등을 한 사람이야. 술 못하던 엘비스와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몫까지 3인분을 마셔야 하니까. 죽어서도 축제가 되는 사람이 엘비스야.”

“흔히 생각하는 '기적'이란 가망 없는 대형 사고에서도 혼자 살아남는 거지. 일상을 기적이라 얘기하는 사람은 없어. 하지만 엘비스는 ‘행복의 무지개는 자기 주머니에 있다’고 했어. 기적은 항상 우리 주위에 있고 만남과 만남에서 항상 이뤄진다는 거야. 로큰롤은 그런 거야. 단순명료하지.”

“언제 엘비스에 빠지게 됐느냐고? 어느 봄날, 귓전을 울리는 아름다운 음률이 있었으니. 소싯적 들은 리듬을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신경, 그 감동 그대로 기억하고 있어. 나이는 물어보지 말고. 엘비스가 마흔 둘에 죽었는데 어떻게 내가 마흔 셋, 마흔 넷이 되느냐고. 난 영원한 마흔 두 살이야.”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더 많은 정보를 원하시면 블로그 ‘돌쇠공주 문화 다이어리(blog.joins.com/zang2ya)’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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