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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윈도] 스파이와의 거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15년간 미 연방수사국(FBI) 핵심간부로 있으면서 첩보위성.조기경보체제.간첩망 등 특급비밀을 1백40여만달러에 모스크바에 팔아넘긴 전후 최대의 스파이.

모스크바로 흘러들어간 정보만도 컴퓨터 디스켓 20개와 서류 6천쪽 분량. 이중간첩 비밀을 넘겨주어 미국 스파이로 일하던 옛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 두명이 처형되도록 한 스파이.

이런 국사범(國事犯)이라면 웬만한 나라에선 사형에 처할 것이다. 그런 죄인 로버트 핸슨을 미국은 최근 살려주기로 결정했다.

미 연방검찰은 핸슨으로부터 스파이 활동에 관한 보다 자세한 얘기를 듣는 대신 사형을 구형하지 않기로 변호인단과 합의했다. 검찰은 가석방이 없는 무기징역으로 타협을 봤다. 핸슨 사건은 국가나 사회의 이익을 위해 '진실과 감형' 을 주고받는 미국의 감형거래(plea bargain)제도가 가장 극적으로 구현된 경우다.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지난 2월 18일 핸슨이 체포된 이래 6월 초까지 고위관리들 사이에선 사형론과 감형거래론이 팽팽하게 맞서왔다. 존 애슈크로프트 법무장관과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핸슨은 죽어 마땅하며 스파이 활동에 대해 추상 같은 경고를 주기 위해서라도 그를 사형대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조지 테닛 중앙정보국(CIA)국장과 루이스 프리 연방수사국(FBI)국장은 핸슨이 국가에 끼친 손해의 규모를 정확히 알아내기 위해 감형거래로 핸슨의 입을 열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사형을 얻어내려 할 경우 정식 재판을 열어야 하며 그러면 핸슨의 존재를 알려주고 미국에 망명한 러시아 스파이를 증언대에 세워야 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결국 현실론이 이겼다. 애슈크로프트와 럼즈펠드는 6월 초 후퇴했으며 검찰과 변호인은 구체적인 감형거래 협상을 시작했다. 거래가 잘 이뤄져 수사당국은 1주일 전부터 핸슨의 입으로부터 중요한 추가사실을 끄집어 내고 있다.

변호인들에 따르면 핸슨은 협상 초기 자신의 죽음보다 아내가 어려운 지경에 처할 것을 더 걱정했다고 한다. 자신이 모스크바로부터 1백40만달러를 받았기 때문에 아내가 살고 있는 집이 압류될까봐 염려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부인에게 집을 보장했고 핸슨 연금의 일부를 받도록 했다.

워싱턴=김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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