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중소기업 회장 일가가 괴한들에게 납치돼 9시간여 동안 끌려다니다 현금 5억원의 몸값을 주고 풀려난 사건이 발생했다.
10일 경찰에 따르면 건축용 콘크리트 등을 생산하는 B공업㈜ 장모(75)회장과 장 회장의 부인, 딸, 운전기사(41) 등 4명은 9일 새벽 강원도 홍천 대명콘도 인근 등산로에서 6~7명의 괴한에게 납치당했다.
20~30대의 납치범들은 장 회장의 아들에게 몸값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뒤 장 회장 등을 서울까지 끌고 와 돈을 받은 뒤 풀어주고 달아났다.
◆ 납치=장 회장 일행 4명은 9일 오전 4시쯤 평소 즐겨 찾던 홍천 대명콘도 인근의 야산(경기도 양평군 단월면)으로 가기 위해 자신의 렉스턴 승합차를 타고 서울 평창동 자택을 나섰다. 장 회장 일행이 오전 6시55분쯤 등산로 입구에 도착해 운동화 끈을 조이며 등산을 시작하려던 순간 1t 탑차(철제로 만든 네모난 구조물을 실은 화물차)가 이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어 탑차에서 내린 20~30대로 보이는 괴한들은 각목을 휘두르며 "고개를 숙여라" "시키는 대로 해라"고 위협했다.
괴한들은 준비한 흰색 나일론 끈으로 장 회장 일행을 묶은 다음 탑차의 화물칸에 타도록 했고 장 회장의 렉스턴도 빼앗았다.
◆ '몸값' 5억원 지불=렉스턴과 탑차에 나눠타고 서울로 향하던 괴한들은 이날 낮 12시쯤 장 회장을 따로 불러내 아들(39)에게 전화를 걸어 돈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장 회장은 범인들 앞에서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유는 묻지 말고 현금 5억원을 준비해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 앞 도로변으로 나오라"고 말했다.
장 회장의 아들은 은행에서 현금 5억원을 마련해 서류박스 3개에 나눠 담고 오후 3시쯤 조선호텔 앞 인도에서 범인들을 기다렸다.
범인 중 한명은 장 회장과 함께 렉스턴을 타고 나타나 차창 너머로 장 회장의 모습을 확인토록 한 뒤 돈을 차 뒷좌석에 싣게 하고 곧바로 사라졌다. 현장에 함께 나왔던 장 회장 회사 관계자는 돈을 줬는데도 장 회장이 곧바로 풀려나지 않자 경찰에 신고했다.
범인들은 10여분쯤 지나 남산 3호 터널 입구에서 장 회장을 풀어줬고, 이어 오후 3시40분쯤엔 장 회장의 부인과 딸, 운전기사도 부근에서 탑차에 남겨둔 채 도주했다. 범인이 타고 갔던 장 회장의 렉스턴은 이날 오후 4시쯤 서울 이태원에서 발견됐다.
◆ 경찰 수사=범인들은 사전에 철저하게 범행을 준비했다. 장 회장 일행이 주변에 알리지 않고 오전 4시에 출발한 시점부터 줄곧 뒤를 밟아 홍천 야산까지 미행했고, 납치를 위해 탑차를 준비한 점 등으로 미뤄 전문 납치범의 소행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경찰은 원한이나 돈 관계 문제로 청부폭력배 등이 동원됐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수사 중이다.
경찰은 렉스턴과 탑차에 남아 있던 범인들의 지문을 채취해 이들의 신원을 파악하는 한편 장 회장 일행이 풀려난 남산 3호 터널 CC-TV 카메라에 잡힌 범인 1명과 범행에 사용된 차량의 모습을 토대로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수기.박성우 기자
*** 일당 6 ~ 7명 … 단순.청부납치 양면수사
B공업 회장의 일가족 납치 사건은 납치 대상이 모두 성인이고, 범행을 저지른 일당이 6~7명이나 된다는 점에서 미국이나 남미에서 벌어지는 범죄집단의 조직적인 납치극을 연상시킨다.
경찰은 ▶부유층을 노린 단순 범행▶장 회장과 관계된 사람의 청부 범행 등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우선 돈을 노린 단순 범죄일 가능성이다. 범인들이 장 회장 일행 4명을 납치하기 위해 탑차를 미리 준비했고, 돈을 주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처와 딸 등 가족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는 점에서 전문적인 범죄조직의 소행일 수 있다고 경찰은 판단하고 있다.
납치범들이 현금 5억원을 건네받고 20여분 만에 회장 일가를 풀어준 것도'한탕'을 노린 단순 납치사건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또 범인들은 돈을 요구하면서도 장 회장이 직접 전화하도록 해 장 회장이 인질로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자신의 얼굴을 피해자들에게 의도적으로 노출하는 대담성을 보이기도 했다.
경찰은 그러나 범인들이 장 회장의 일정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으로 미뤄 장 회장 일가를 잘 아는 제3의 인물이 개입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장 회장은 평소 자신의 행선지를 회사를 물려준 아들에게도 잘 알리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납치 몸값으로는 비교적 거액인 5억원을 요구한 점도 장 회장 일가의'현금 동원 능력'을 알고 있는 주변 인물의 개입 가능성을 크게 하고 있다.
장 회장이 운영하는 B공업은 대전.충남 지역 유일의 전신주 제작업체로 한전과 KT에 납품하고 있다.콘크리트 제품을 생산하는 이 회사는 종업원이 100여명이며, 연간 매출액은 80억~90억원이다.
박성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