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한국의 모네' 를 기다리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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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제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만 하더라도 프랑스는 강국 독일을 꺼렸다. 독일이 강해지면 언제나 치러야 했던 수많은 전쟁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발빠른 재건에 전쟁재발에 대한 프랑스의 공포가 더해갔다. 이를 뒤집은 사건이 1950년의 유럽철강석탄공동체(ECSC)였다.

*** 피해자가 먼저 화해 손길

ECSC는 유럽의 평화를 위해서는 프랑스와 독일이 화해해야 하고 항구적 유럽 평화를 위해 '유럽합중국' 을 건설해야 한다는 장 모네의 비전이 이룩한 것이었다. 피해자 프랑스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뻗어 가해자 독일 스스로 '진정한 사과' 와 참회를 할 수 있는 여유를 마련해 준 것이다.

모네가 초대위원장을 맡은 ECSC협정은 '경제공동체를 구성함으로써 피로 물든, 국가간 마찰에 의해 분열된 각국 국민이 더 폭넓고 깊은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함을 목적으로 한다' 고 시작하고 있다.

ECSC는 유럽공동체(EC)를 거쳐, 43년 후 유럽연합(EU)으로 귀결됐다. 그래서 유럽인들더러 '유럽연합의 아버지' 를 꼽으라면 서슴없이 모네를 꼽는다.

동북아에는 그 모네가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더 넓고 깊은 경제.사회통합으로 바쁜 걸음을 내딛고 있는 유럽과 미국대륙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경제통합은커녕 이 지역만큼 주요국들이 서로 상호 부정과 반목으로 날을 지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자주 지적되듯 동북아에는 유럽인 같은 공동체 의식이 없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경우만 보더라도 불과 2년반 전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21세기 파트너십' 에 흥분하던 분위기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길이 없다. 너무나 극명한 역사왜곡에 우리의 감정은 격앙될 대로 격앙돼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런 상태로 갈 수는 없다. 어쨌거나 지난 36년간 정상화된 관계 속에서 가장 활발한 경제교류를 해 오던 상대를 이제 와서 그 존재를 부인할 수는 없다.

경제협력을 통해 갈등을 평화공존으로 바꾸는 모네의 공동체는 한.일간에는 재현될 수 없는 것인가. 이렇듯 양국이 적국처럼 서로 눈을 부라리고 있을 때야말로 '동북아 공동체의 모네' 같은 이가 더욱 더 절실히 필요한 때가 아닐까 싶어 갖게 되는 의문이다.

그러고 보면, 최근 한.일관계에서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와 독일 사이와 같은, 마치 deja vu(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 착각) 같은 역사적 유사점을 찾게 된다. 일본과 독일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부터 같다.

또 끈질기게 사회 곳곳에 잔존한 국수주의자들이 때때로(특히 경제가 어려울 때면)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나, 정부.지식인 그리고 대부분 국민이 과거 잔학사를 진솔하게 반성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렇게 비슷할 수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독일은 진정한 사과를 했고 일본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혹시 그 차이가, 프랑스가 독일에 해 줬듯이 피해자 한국이 가해자 일본으로 하여금 스스로 진정한 사과를 할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아서는 아닐까. 혹시 지금이야말로 자유무역협정(FTA) 같은 역사적 의표 찌르기가 필요한 때는 아닐까.

유럽통합이 우리에게 웅변하는 게 한가지 있다면, 그것은 서로간의 국경이 무너지고 그 결과 사람과 자본, 그리고 재화와 서비스의 자유로운 교류가 이뤄지면 과거 국가간에 존재했던 긴장의 대부분이 간단히 소멸된다는 역사적 교훈이다. 일본과 한국이 FTA로 하나로 묶어진다면 그것은 모네의 ECSC보다 더 큰 사건이다.

*** 韓日 자유무역협정 시급

중국도 이에 참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일 자유무역협정은 동북아 자유무역협정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고 또한 이는 동북아 공동체, 즉 동북아의 항구적 평화와 번영으로의 첫걸음을 의미하게 된다는 얘기다.

그 토대를 한국이 마련했다는 역사적 평가도 가능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꿈꿔야 할 동북아 공동체가 아닐까? 언제까지 20세기의 문제가 21세기 동북아 공동체로 나아가는 우리의 발목을 잡게 할 것인가. '한국의 모네' , 그의 등장을 고대해 본다.

김정수 <논설위원겸 경제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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