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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평양의 엉뚱한 요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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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북한은 최근 부시 행정부에 대해 경수로 보상 문제가 북.미 대화의 최우선 과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과거 클린턴 행정부는 평양의 이같은 주장을 묵살한 바 있고 부시 행정부 역시 이 주장에 귀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경수로는 1994년 10월에 체결된 북.미 제네바 합의에 따라 설립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통해 북한에 제공되는 것이다.

KEDO는 한.미.일과 유럽연합(EU) 등이 참여한 국제 컨소시엄이다. 북한은 제네바 합의에 따라 영변의 원자로를 동결시키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경수로 2기를 제공받는 데 합의했다. 경수로 완공 목표 시기는 2003년으로 돼 있다.

그러나 경수로를 2003년까지 완공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상황이다. 아무리 일러도 경수로 1기를 완공하려면 지금부터 최소 5년이 더 소요될 것이다.

주목할 점은 북한 자신이 경수로 공사 지연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평양은 자신에게 제공될 경수로가 '한국형 경수로' 라는 데 대해 격렬히 반대했다.

그 결과 경수로 공사는 1년 이상을 허송세월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은 또 98년 8월 대포동 미사일을 일본 열도 위로 발사했다. 당연히 일본의 국내 여론은 끓어올랐으며 일본 정부는 10억달러에 달하는 경수로 분담금 지원을 늦췄다. 경수로 공사도 부득불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경수로 공사에 투입된 북한 근로자들이 KEDO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감행했다는 점이다. 결국 KEDO는 북한 근로자들 대신 옛소련 우즈베키스탄 출신 근로자를 투입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KEDO가 북한당국에 '계약' 과 '법의 존중' 이 무엇인지 교훈을 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와중에 경수로 공사가 지지부진해진 것은 물론 북한 자신도 짭짤한 외화 소득원을 잃었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평양의 경수로 보상 요구는 엉뚱하기 짝이 없다. 왜냐 하면 북한은 이미 에너지 손실에 따른 보상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제네바 합의문은 "북한의 흑연 감속 원자로 동결에 따른 에너지 보상을 위해 경수로 1기 제공 전까지 중유 50만t을 제공한다" 고 규정하고 있다. KEDO는 이 규정에 따라 지금까지 중유를 꼬박꼬박 제공해 왔다.

어떤 의미에서 KEDO가 제공하는 중유는 경수로보다 북측에 훨씬 유용하다. 왜냐 하면 북한은 전력을 공급할 송배전(送配電)시설이 없다. 즉 경수로를 지금 당장 완공한다 해도 북측은 이를 공급할 수단이 없다. 반면 중유는 바로 연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평양이 제네바 합의를 준수하는 한 워싱턴도 이를 준수하겠다고 거듭 천명해 왔다. 북한도 지금까지 제네바 합의를 준수해 왔다.

그러나 제네바 합의의 핵심은 핵사찰이다. 제네바 합의에 따르면 북한은 경수로 핵심 부품이 북한에 반입되기 전 평양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체결한 핵안전협정 의무를 완전히 준수해야 한다.

북한은 지금까지 경수로 핵심 부품이 반입되지 않았다는 핑계로 IAEA의 핵사찰을 피해왔다. 그러나 평양이 명심해야 할 점은 제네바 합의가 규정하고 있는 '북한내 모든 핵물질 및 최초 핵보고서의 정확성과 완전성 검증' 을 위해서는 최소 2~4년 정도가 소요된다는 것이다.

북한은 지금까지 IAEA의 과거 핵사찰 작업을 거부해 왔다. 또 북측은 지난 5월 IAEA의 핵검증 허용 요청을 거부했다.

부시 행정부는 그동안 KEDO의 경수로 공사의 지속을 위해서라도 평양이 IAEA의 검증을 허용해야 한다고 줄곧 말해왔다. 만일 북한이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 에도 워싱턴의 이같은 입장을 무시하고 IAEA의 과거 핵사찰을 허용하지 않을 경우 경수로 공사는 지연되거나 아주 중단되고 말 것이다.

랠프 코사

※랠프 코사 박사는 하와이 호놀룰루 소재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의 퍼시픽 포럼 이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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