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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 혁명의 영웅들 어떻게 집권했고 왜 몰락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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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2000년대 초·중반 옛 소련 국가들을 휩쓴 ‘색깔 혁명’의 영웅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쿠르만베크 바키예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은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는 가운데 7일 밤(현지시간) 소형 비행기 편으로 수도 비슈케크를 탈출했다. 2005년 ‘튤립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바키예프가 ‘제2의 튤립 혁명’으로 쫓겨난 것이다.

앞서 2004년 ‘오렌지 혁명’으로 대통령이 된 우크라이나의 빅토르 유셴코는 올 2월 대선에서 패해 권좌에서 물러났다. 2003년 ‘장미 혁명’으로 색깔 혁명의 서막을 열었던 그루지야의 미하일 사카슈빌리 대통령 역시 러시아와의 전쟁 패배 등으로 궁지에 몰린 상태다.

격렬한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의 정부청사 앞에서 7일(현지시간) 방패로 몸을 가렸던 시위대가 경찰의 총격을 받아 쓰러지고 있다. [비슈케크 로이터=뉴시스]

◆‘도미노’ 민주화 혁명=키르기스의 튤립 혁명은 2005년 치러진 의회 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시작됐다. 대규모 부정이 저질러졌다는 의혹과 함께 전국에서 반정부 운동이 벌어졌다. 15년간 장기 집권했던 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은 카자흐스탄을 거쳐 러시아로 도피했고, 4월 4일 모스크바의 키르기스 대사관에서 사임 문서에 서명했다.

혁명 초기 반정부 시위대는 자신들의 혁명을 핑크 혁명, 레몬 혁명 등으로 불렀다. 하지만 아카예프는 “서방이 자신들에게 고분고분한 정권을 세우기 위해 혁명을 유도하고 있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 같은 색깔 혁명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키르기스에서 일고 있는 혁명 움직임을 ‘튤립 혁명’이라고 지칭했다. 튤립은 카자흐스탄·키르기스 등이 원산지로 알려져 있는 꽃이다.

그루지야의 ‘장미 혁명’ 과정도 비슷했다. 2003년 11월 총선에서 부정이 발각되자 시민들은 정권에 대한 항의 표시로 장미 한 송이씩을 들고 거리에 나섰다. 시위대가 앞을 막아선 진압 병력에게 장미꽃을 꽂아주는 모습은 전 세계적인 화제가 됐다. 결국 경찰·군대도 시민들의 편에 섰다. 독재자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은 러시아 외무장관의 중재 하에 야당 지도자들을 만난 후 사임을 발표했다. 10만 명의 시위대는 밤새 불꽃놀이를 하며 시민 혁명의 승리를 자축했다.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은 좀 더 극적이었다. 2004년 11월 대선에서 야당의 빅토르 유셴코 후보는 여당 후보인 빅토르 야누코비치에게 박빙의 차이로 패했다. 하지만 부정의 증거가 속속 드러나고, 유셴코가 상대 후보에 의해 독극물에 중독됐다는 소문이 돌면서 오렌지 혁명이 시작됐다. 시민들은 야당을 상징하는 오렌지 색 옷과 목도리를 걸치고 거리로 나섰다.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자 우크라이나 대법원은 재선거를 명령했다. 그 결과 유셴코는 최종 승리를 거뒀다.

◆부패·무능으로 실각=색깔 혁명의 영웅들은 그러나 집권과 더불어 ‘타락’해 갔다. 아카예프를 축출하고 권좌에 오른 키르기스의 바키예프는 자신의 아들에게 나라의 ‘돈줄’을 맡겼다. 이에 반발하는 야당과 언론은 힘으로 탄압했다.

우크라이나의 유셴코는 집권 뒤 ‘혁명 동지’ 율리야 티모셴코 전 총리와 집안싸움을 벌였다. 정국은 혼란에 빠졌고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는 더욱 심해졌다. 친서방 노선에 집착해 러시아와 대립하면서 러시아산 가스 공급이 중단돼 국민의 원성을 샀다. 결국 유셴코는 2월 대선에서 18명의 후보 중 득표율 5위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대권은 티모셴코와의 결선 투표에서 승리한 ‘오렌지혁명의 패배자’ 야누코비치에게 되돌아갔다.

그루지야의 사카슈빌리는 취임 직후 국회·사법부 수장을 모두 측근으로 채웠다. 민주화와 사법 개혁 약속은 말뿐이었다. 2008년 러시아와의 ‘5일 전쟁’에 패하면서 나라 경제는 파탄에 빠졌다. 사카슈빌리는 “러시아가 먼저 남오세티야를 점령해 이에 맞섰을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지난해 유럽연합(EU)은 전쟁 책임이 그루지야에 있다고 결론 냈다. 야당은 “실정으로 나라를 망쳤다”며 그의 사임을 촉구하고 있다.

김한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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