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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진짜 가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진짜보다 좋은 가짜' 가 있다면 이야말로 '진짜 가짜' 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가짜 벌꿀, 가짜 참기름에서 가짜 서화골동품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우리는 가짜천국에 살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안방까지 밀려드는 정보화시대의 사이버 세계와 현실의 혼돈과 괴리를 체험하고 있다.

이런 가짜와 가상의 홍수 속에 살다보니 내가 가짜를 보고 있는 것인지, 가짜 속에 내가 진짜를 보고 있는 것인지 장주(莊周)의 나비처럼 도무지 아리송해진다.

오늘 예술의전당에서 아주 특이한 기획전으로 진작(眞作)과 안작의 비교전시회를 중국 랴오닝(遼寧)성박물관의 협조를 얻어 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진짜 그림과 가짜 그림을 한 자리에 놓고 비교해보는 전시회다. 이런 전시의 기획의도는 결국 관람자들이 그림 보는 안목을 키움으로써 변별력을 길러 안작을 막자는 데 그 목적이 있을 것이다. 안작의 역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서화 그 자체의 역사와 거의 때를 함께 해 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안작 사건으로 서화가는 물론이고 많은 수장가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원래 동양화론에는 선배의 훌륭한 작품을 모범삼아 화혼(畵魂)과 사의(寫意)를 물려받는 전이모사(轉移模寫)과정이 있었다. 분명한 안작임에도 버리지 못하고 그 나름의 값매김을 받고 있는 경우가 바로 그 것이다.

많은 안작의 사례 중에 지금도 부러움과 함께 기억되는 고사가 하나 있다. 청대 유명 서예가인 동주(東洲) 하소기(何紹基)가 젊었을 때 일이다.

어느 날 한가롭게 저잣길로 산책을 나갔는데 때마침 많은 구경꾼들에게 둘러싸여 글씨를 써서 팔고 있는 한 노인을 보게 됐다. 그래도 당시 필명을 날려 자기 글씨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던 그가 노인이 휘두르는 용호상박의 필력 앞에 그만 기가 죽어 망연자실, 흠상(欽賞)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낙성관지(落成款識)하는 것을 보니 이게 또 무슨 변고인가. 노인이 휘갈겨 쓴 글씨 옆에 동주라는 자기 아호를 버젓이 써 넣더니 그 밑에 도장까지 빨갛게 찍은 다음 즉석에서 팔고 있는 것이다. 정신을 수습한 동주는 그 순간 크게 깨닫고 신분을 감춘 채 그 노인을 집으로 모신 후 주안상을 차려 놓고 스승이 되어 주기를 간청했다.

어렵사리 허락을 받아낸 동주가 조심스레 안작의 사유를 물으니 노인이 쳐다보지도 않고 "낸들 아오. 글씨는 내가 잘 쓰나 이름은 동주란 자가 더 났으니 먹고 살기 위해서는 그 자의 도장을 찍을 수밖에…" 라며 시큰둥하게 대꾸하는 것이다.

진짜 동주는 이 말을 듣고 그동안 자신의 글씨가 득명하게 된 데에는 이 노인의 공로가 컸음을 알고 가짜 동주에게 자신이 진짜 동주임을 부끄러이 고백했다.

이후로 동주는 더욱 서법에 정진해 그 누구도 그의 가짜 작품을 만들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올라 홀로 일가를 이루게 됐으니, 이런 안작이야말로 '진짜로 가짜' 가 아닌가 싶다.

하기야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명말 청초에 걸쳐 안작이 성했다고 한다. 세칭 소주조파는 문징명.당인.구영의 그림을, 하남조파는 개봉을 근거지로 안진경.악비.주희의 글씨를 위작했고, 후문조파는 천안문 근처 아지트에서 궁정화가들의 작품을 위작해냈다.

특히 이탈리아 사람으로 귀화해 궁정화가가 된 낭세령(郞世寧)의 가짜 그림을 많이 그려 지금도 그의 안작들이 돌아다니고 있음을 본다. 얼마 전에 랴오닝성박물관의 초대를 받아 그 곳에 갔다가 1백여점의 제백석 진본을 대하고 나니 그동안 주변에 흔히 눈에 띄는 작품 대부분이 안작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지금 우리는 물질만능의 가치관 속에서 오직 영리만을 추구하는 가짜의 피해자들이다. 이번의 명작과 가짜 명작 비교전이 남의 나라에 있었던 과거지사로 돌려버릴 수만은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가짜를 진짜라고 속이는 것만큼이나 진짜를 가짜라고 오판하는 것도 크나큰 죄악이다. 이제 우리도 화단의 안작 실태를 한 번쯤 살펴보고 작품의 진부를 가릴 수 있는 문화적 안목을 키우며 전문학문으로서의 감식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다.

李鍾祥(서울대학교 박물관장)

경력: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초대개인전 17회,

300여회 단체전 초대전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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