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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키질과 개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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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쭉정이와 티끌, 검부러기 등을 걸러내는 농기구가 키다. 경상도에서는 '칭이' , 강원도에서는 '치' , 전라도에서는 '챙이' 라고 한다.

보통 고리버들이나 대로 만드는데 키를 가리키는 한자 '기(箕)' 는 대로 만든 키의 형상에서 유래했다. 납작하게 쪼갠 대오리를 엮어 앞은 넓고 편평하며 뒤는 좁고 우긋하게 만든다. 또 바람이 잘 일도록 양 옆에 작은 날개를 붙인다.

곡식을 키에 담고 까부르면 쭉정이처럼 가벼운 것은 날아가거나 앞에 남고 무거운 알곡은 뒤로 모이는데 이것이 '키질' 이다. 또 키를 높이 들고 안에 담긴 곡식을 천천히 쏟아내려 불순물을 골라내는 '키내림' 도 있다. 키를 부쳐서 일어난 바람으로 검부러기를 날려보내는 것은 '나비질' 이다. 전기로 돌아가는 풍구가 보급되면서 농촌에서 키질하는 모습을 구경하기 힘들어졌다. 대신 엉뚱한 곳에서 키질이 한창이다.

키질하는 것을 영어로는 '위노(winnow)' 라고 한다. 가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려내 식별한다는 비유적 의미로 종종 사용된다. 이 때 위노는 구별하고 분리하는 것을 뜻하는 '세퍼레이트(seperate)' 나 '디스팅귀시(distinguish)' 와 동의어가 된다.

그래서 쭉정이에서 알곡을 분리하고, 티끌과 낟알을 구별하는 키질은 사회적 불순물을 제거하는 '순화(純化)' 와 '정화(淨化)' 라는 정치적 함의도 갖고 있다. 농부가 하는 키질이 아니라 권력이 하는 키질이다.

권력을 손에 쥐면 대부분 개혁의 이름으로 키질을 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된다. 시인 신동엽이 외쳤듯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는 데 반대할 명분도 없다.

신군부가 정권을 잡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언론 통폐합이었고, 삼청교육대 창설이었다. 키질을 당하는 당사자야 싫어하겠지만 구경꾼들은 박수를 친다. 키 위에 재벌을 올려놓고, 의사를 올려놓고, 교사와 교수를 올려놓고 까불어댄다.

'성역(聖域)' 으로 손가락질 받던 언론도 결국 키 위에 올려졌다. 키질이 끝나면 알곡은 남고, 쭉정이는 날아갈 것인가. 무엇이 알곡이고, 무엇이 쭉정이인가.

진정한 개혁은 미래에 대한 투자다. 인기는 없으면서 효과는 더디다. 개혁을 위한 키질도 있고, 얼굴만 개혁인 키질도 있다. 실체는 훗날 역사가 말할 뿐이다.

언론사 세무조사를 진두지휘한 안정남(安正男)국세청장은 "그간 노고에 대해 한마디쯤 할 줄 알았다" 며 치하할 줄 모르는 국회의원들의 '무례' 를 아쉬워했다. "청장님,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어떤 키질을 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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