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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10대산업 키우자] 14. 디지털로 거듭나는 소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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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즐거움을 주는 기술' 이 창업정신인 일본 소니가 디지털 가전 시대를 맞아 네트워크 회사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인터넷에 이은 네트워크 시대의 패권을 겨냥한 소니의 야심찬 변신현장을 일본 현지 취재를 통해 진단한다.

디지털 가전의 대명사 소니(http://www.sony.co.jp)의 심장부인 도쿄(東京) 중심가 시나가와(品川)구. 본사 건물과 소니 제품 전시장 등 10여 동이 밀집한 곳이다. 여기서 차를 타고 동남쪽으로 10㎞ 길이의 장대한 해저터널을 지나 30여분을 달려 지바(千葉)현 기사라즈(木更津)에 이르면 한 소니 공장이 나타난다. 기술과 제조를 분리하려는 소니의 또 다른 실험이 진행 중인 현장이다.

◇ 기술과 제조 분리=소니는 지난 4월 대규모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사업 내용을 디지털 가전 시대에 좀더 걸맞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기사라즈 공장은 이 때 소니 본사에서 독립해 '소니 EMCS' 라는 별도 법인으로 통합된 일본 국내외의 11개 생산시설 중 하나다.

EMCS란 '엔지니어링 매뉴팩처링 커스터머 서비스' 의 약자. 제품의 설계.생산에서부터 애프터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제품 순환의 전 과정을 본사에 의존하지 않고 생산 조직이 도맡아 하는 체제다. 독립채산제여서 효율이 떨어지는 공장이나 생산라인은 가차없이 도태될 수밖에 없다. 소니는 전세계 1백여개 생산시설을 대상으로 이런 실험을 확대할 생각이다.

대지 2만3천여평에 종업원 2천6백여명 규모의 기사라즈 공장은 한창 주가를 올리는 바이오PC와 플레이 스테이션2 게임기 등 소니 간판 브랜드의 산실이다. 하지만 내부를 둘러보면 그 흔한 컨베이어 벨트 하나 없다. 직선형 대신 I자 또는 U자형 생산라인이 배열돼 있고, 10~30명씩 일하는 공정별로 '○○숍' 같은 명찰이 붙어 있다. 공정도 하나의 가게처럼 손익을 계산하는 독립채산제로 운영하겠다는 것이다. 아오누마 유키오(靑沼行雄) 공장 대표는 "특정 제품의 수요가 뜸해 일감이 줄면 주문이 많은 다른 공정에 인력을 꿔줄 수 있다" 고 말했다. 이곳 근로자들은 이를 위해 평소 세가지 정도의 작업에 늘 투입될 수 있게 기능교육을 받고 있다.

이런 노력 덕분에 고가 부품이 공장 안에 24시간 이상 머무르는 일이 없도록 재고관리가 잘 되고 있다.

소니가 시도하는 EMCS 체제는 미국 최대 정보기기 위탁 생산업체인 솔렉트론처럼 결국 자기 회사뿐 아니라 마쓰시타.필립스.삼성 등 경쟁사 제품도 주문생산해주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김학상 수석연구원은 "일본 기업들의 최후의 보루인 제조.생산 부문까지 과감히 아웃소싱에 나설 정도로 소니는 변화를 즐기는 조직" 이라고 말했다.

◇ 네트워크 회사로 변모=미디어월드.소니빌딩 등 도쿄 시내의 소니 전용 전시관들을 둘러보면 소니가 단순히 캠코더 같은 오디오.비디오(AV)기기를 만드는 업체가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이곳에선 세계의 멀티미디어와 콘텐츠의 첨단 흐름을 가장 먼저 숨쉴 수 있다.

소니의 야심작인 신개념 정보 단말기 에어보드가 그런 제품이다. 액정 화면을 본체에서 분리할 수 있어 가정이나 사무실에서 무선으로 TV.인터넷 등을 접할 수 있다. PC가 없어도 소니 제품만 있으면 24시간 멀티미디어에 접속이 가능하다.

안도 구니다케(安藤國威) 소니 사장은 "가전의 정보화는 이제 안방이나 개인간의 의사소통에까지 깊숙이 침투했다" 면서 "유익한 콘텐츠를 만들어 가능한 모든 전자매체를 통해 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소니의 이상" 이라고 말했다. 이데이 노부유키(出井伸之) 소니 회장이 요즘 가장 강조하는 말도 바로 '네트워크' 다.

1990년대 중반 뒤늦게 시작한 PC 사업이 대성공을 거둔 것(일본 시장 점유율 30%)은 바이오(VAIO)라는 브랜드 뜻처럼 비디오(V).오디오(A) 개념을 통합(I)한 점이 주효했다. 닌텐도와 대결해 플레이 스테이션 게임기를 세계적 브랜드로 키운 것도 바로 콘텐츠에 대한 소니의 노하우 때문에 가능했다. 소니가 출시하는 연간 1억2천만개의 각종 전자제품 중 절반은 이미 인터넷과 접속이 가능한 디지털 제품들이다.

소니는 '네트워크' 를 강화하기 위해 사업조직도 크게 뜯어 고쳤다. 지난해까지 인터넷 단말기를 중심으로 PC.TV.플레이 스테이션.휴대용 정보단말기(PDA) 네가지 사업부문을 운영했지만 올해부터 사업을 모바일 기기와 홈 기기로 양분해 사내 조직도 이에 맞게 개편했다.

소니 관계자는 이에 대해 "차세대 멀티미디어 수단으로 경합을 벌이는 TV와 PC의 이분법에 얽매이지 않고 인터넷과 연동된 홈 네트워크 상품으로 안방을 제패하고 다가올 개인간 전자상거래(P2P)시대를 선도하려는 것" 이라고 설명했다.

소니의 전세계 사업망 역시 네트워크를 중시한다. 가령 소니코리아는 도쿄 본사에서 영업전략을 받지만 자금은 아시아 재무본사인 홍콩에서 조달하고 투자는 암스테르담 지주회사를 통해 이뤄진다. 상당수 제품은 말레이시아 현지 생산기지의 것을 조달한다.

가전의 황제로 군림해 온 마쓰시타도 지난 3월 현재 소니와의 가전 매출 격차가 3천6백억엔(10년 전 3조엔)으로 급속히 좁혀지면서 긴장하고 있다. 특히 대리점 등을 통한 오프라인 판매에 주력해 온 마쓰시타와 달리 소니는 지난해부터 직판 사이트(http://www.sonystyle.co.jp)를 이용한 인터넷 판매에 나서 물류에서도 앞서 나가고 있다.

◇ 반도체.이동전화 보강이 과제=소니도 고민이 없을 수 없다. AV 기기의 선두주자를 자처하면서도 반도체.액정표시장치 등에 대한 투자시기를 놓쳐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가전제품의 디지털화가 진전될수록 이들 핵심부품의 원가비중이 더욱 커지고 있다.

소니가 야심차게 벌인 '소넷' 사업도 여타 가전 포털사이트와의 차별화에 고심하고 있다. 지난해 클리에라는 브랜드로 휴대용 정보 단말기(PDA)시장에 뒤늦게 출사표를 던졌지만 이동전화 부문의 취약점을 극복하지 못해 스웨덴 에릭슨과의 제휴를 서두르고 있다.

진대제 삼성전자 사장은 "소니는 혁신적 아이디어 제품을 부단히 개발해내는 초일류 업체" 라면서도 "그러나 휴대폰.반도체 사업이 취약한 상태에서 어떤 식으로 네트워크를 보강해 나갈지 주목된다" 고 말했다.

도쿄=홍승일 기자

도움=김학상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 다음호에는 디지털 가전의 국내 실태와 발전 전략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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