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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포럼] 퍼주기와 뺨맞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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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골프장에 나가면 캐디들이 '북한에만 퍼주지 말고 우리에게도 좀 달라' 고 말해 고위층에도 이런 시정(市井)의 정서를 가감 없이 보고했다. " 대북정책에 깊숙이 개입했던 한 고위인사가 지난 1월 말 사석에서 퍼주기 논란에 대한 민심의 동향과 당국자로서의 고충을 우회적으로 털어놓았던 말이다.

*** 햇볕정책의 급부는 뭔가

국민의 정부가 문민정부와 비교해서 대북지원을 금액상으로 덜 했는 데도 퍼주기 시비에 휘말린 것은 야당과 보수층의 발목잡기 때문이라고 여권은 몰아붙이고 있다. 문민정부는 국제시세보다 5배나 비싼 우리 쌀, 그것도 재고가 넘쳐 처분에 고민했던 묵은 쌀 15만t을 보냈다. 국민의 정부는 생으로 외화를 들여 50만t의 외국산 식량을 보냈다. 현 정부가 이것을 금액상으로만 단순 비교해 자못 억울하다는 입장을 표시할 일은 결코 아니다.

왜 퍼주기라는 비판이 나왔는지에 대한 정부의 성찰이 필요하며, 거기에서 대북정책의 올바른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남북이 반목과 갈등을 접고, 균형이 잡힌 양자간 관계를 올바르게 항속적으로 진전시킬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퍼주기라는 비판은 북에 대한 물적 지원의 개념만으로 파악하면 안된다. 주는 것이 있으면 어느 정도의 반대급부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급부는 남북간에 다 같이 필요하고 이로운 양자관계의 정상화 정도다.

그러나 우리가 대북 햇볕정책의 반대급부로 받은 것은 북의 고자세와 제멋대로의 행태뿐이다. 우리 정부는 그에 굴신하느라 허리가 휠 정도라고 국민에게 비친 것이 '퍼주기' 개념의 생성 및 확산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벌어진 북한 선박의 북방한계선 및 영해 침범사태가 단적인 예다. 북으로선 아예 '뺨때리기' 로 나온 것이며, 우리로선 '뺨맞기' 인 셈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 해군과 북한 상선간에 이뤄진 교신내용은 주객전도의 극치일 뿐만 아니라 굴욕감마저 느끼게 한다.

북한 상선이 정선과 검문을 요구한 우리 해군에 "자꾸 우리 길을 막지 말라. 이러면 도발이다" 라고 적반하장으로 큰 소리를 쳤다. 더구나 북한 선박은 우리 관할수역을 유유히 운항하면서 우리 해군의 기동훈련 상황을 시간대별로 북한당국에 타전까지 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에게 답방약속 이행을 여러차례 호소한 것도 국민정서에 맞지 않는다. 오죽하면 여당 출신의 이만섭 국회의장조차 "정부가 답방문제를 한번쯤 촉구하면 됐지, 그 모양새가 구걸하는 듯해선 안된다" 고 우회적으로 비판했을까. 우리가 북한을 지원하면서도 애걸복걸하는 듯한 정부의 처신과, 받으면서도 한껏 오만을 뽐내는 북한의 자세를 보고 다수 국민이 속이 뒤틀리는 것이다.

이래서야 국민이 무슨 화해고 협력에 신명이 날 것이며 북한을 도와야 하겠다는 생념이 들까. 남북에 모두 손해일 뿐이라는 것을 양쪽 지도자들은 알아야 한다. 남북관계는 한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통일될 때까지 지속될 중대현안이다.

따라서 정부는 대북문제로 국민이 받는 자존심의 상처도 고려하면서 북한에 따질 것은 당당히 따지고 국민을 설득할 것은 적극적으로 설득해야 한다.

*** 對남한 인심얻기가 우선

우리가 북한을 경제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것은 선택의 사항이 아니라 불가피한 운명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올해엔 북한에 90년만의 왕가뭄이 들었다니 우선 대규모 식량지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료도 그렇다. 이런 것은 무슨 반대급부를 바라지 말고 그냥 시원하게 하되 사전에 국민에게 될수록 정확한 북한 식량난을 설명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의 후과(後果)를 사전에 설득해야 한다.

북한도 특정 정권만 상대할 일이 아니라는 인식을 한다면 우리 국민을 상대로 인심 얻기에 나서야 한다. 북한은 요즘 바깥에 대놓고 사정이 어렵다고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도 북한체제의 속성을 알 만큼 알고 있다.

그러니까 무슨 허세를 부릴 것이 아니라 남쪽에 대해 예양을 갖추면서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나 남북관계 개선 등에 성의를 보이기만 해도 남쪽 동포는 흥감해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으로 민족자주를 일으켜 세우고 통일을 앞당기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퍼주기와 뺨때리기만으론 민족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남북 지도자들이 성찰해야 한다.

이수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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