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시론] 우랄알타이권 주목하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군 보안사 내에는 한국어 전문가가 단 두사람만 존재했다. 1945년 이전부터 미 육군에서 암호분석가 겸 통역을 담당했던 캘리포니아 출신 한국계 이민 2세인 윤피 김과 하와이에서 자란 디크 천이 그들이었다.

***람스테트의 한국어 敎本

한국전이 발발하자 미 국방부는 일거에 다수의 한국어 전문가 양성을 서둘렀다. 특히 교과서가 문제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영어로 된 마땅한 한국어 교본이 없었다. 어렵사리 발견한 것이 핀란드 출신의 언어학자이자 외교관이었던 람스테트(1873~1950)교수가 쓴 『한국어 문법』 이었다. 이리하여 람스테트가 쓴 한국어 문법 책은 한국전쟁 초기 미군들의 한국어 기초교본으로 아주 긴요하게 사용됐다.

당시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 중에는 미국으로 이민간 핀란드인 2세들도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미군부대의 통신요원으로 활약하며 상호 핀란드 말로 통신을 주고받으며 적들을 교란시켰다. 이들 핀란드출신 2세들이 미군부대의 통신요원으로 발탁됐던 것도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람스테트는 핀란드어의 기원을 우랄알타이어 계통에서 찾고자, 몽골과 극동지역을 수차례 답사하면서 평생을 이들 언어 연구에 심취했던 학자였다. 러시아가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틈을 타 재빨리 독립을 선포한 핀란드는 헬싱키 대학교수였던 람스테트를 초대 주일대사로 임명했다. 람스테트 교수는 1919~29년 주일대사로 근무하면서 틈만 나면 일본어와 조선어 공부를 했다.

그는 심지어 당시 도쿄(東京)교외에 살고 있던 소위 '조선 부락민' 마을을 빈번히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의 '조선인 부락' 출입은 한때 일본 관헌들로부터 의심받기도 했으나, 조선어 공부를 위한 그의 동기의 순수성이 인정돼 예외로 취급될 정도였다. 람스테트 대사는 귀국 후 헬싱키대학에 유럽에서는 최초로 한국학 강좌를 개설했다. 1956년 프랑스 파리 동양어 학교가 한국어 강좌를 개설한 것보다 무려 20년 더 앞서였다.

유럽에서는 헝가리.에스토니아.핀란드 3개국이 같은 언어권인 핀.위구르어 계통이다. 자고로 이들 3개국간에는 문화적.정서적 교류와 공감대가 밀접하게 형성돼 왔다. 람스테트는 이들 3개국의 언어와 몽골어.한국어.일본어 및 터키어 등으로 대변되는 우랄 알타이 언어권과는 같은 언어적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람스테트 교수의 생각을 우리의 새로운 외교 지평 확장에 원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향후 우랄 알타이 언어권 문화공동체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우랄 알타이 언어권에 속하는 나라들과의 문화적 유대를 강화하자는 것이다.

국제무대에서 다자외교를 해보면, 우리에겐 기댈 만한 확실한 '동아리' 그룹이 없다는 것을 절감한다. 아시아가 지지세력인 것 같지만, 다자외교에서 아시아 국가들은 흔히 우리와 경쟁한다.

특히 동남아시아가 그렇다.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은 아세안대로, EU(유럽연합)는 EU대로, 스칸디나비아 5개국은 그들대로 각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호혜정신을 발휘하지만, 한국은 들러리나 소위 직할부대가 없다.

***多者외교 '동아리' 형성을

유럽과 아시아가 기차와 육로로 연결되는 신(新)실크로드 시대를 앞두고 일본에서 몽골.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거쳐 헝가리.에스토니아.핀란드에 이르기까지 산포돼 있는 범(汎)우랄 알타이 언어권 국가들과의 유대 심화는 다자외교 무대에서 우리들의 '동아리' 를 형성할 수 있는 모멘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구미지역에 편중돼 있는 한국학 진흥을 위한 우리의 지원이 점진적으로 이들 우랄 알타이 언어 문화권으로 확대되고 강화돼야 한다. 이것이 필자가 핀란드를 떠나며 남기고 싶은 말이다.

양동칠 <주 핀란드 대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